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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재방영(상영)관

#4-3. 니시미야 유즈루, 그 외: 디스커뮤니케이션은 누구에게나 있다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 3부)




애니메이션 이야기하는 낭인.

스카이포스터, 인사드립니다!


저번 영상에서 저는 우에노와 카와이가 어떤 생각 과정을 거쳐 그런 행동이나 말이 나왔는 지를 이야기해봤고, 그럼에도 이 둘의 행동에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의 결과,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핵심은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말이 의도한 대로 받아들여지지 못 하는 디스커뮤니케이션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죠.


이제 이 디스커뮤니케이션의 이야기를 집단 괴롭힘 사태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캐릭터들의 밖으로 한 번 돌려보겠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쇼코의 편에 서있는 든든한 동생, 니시미야 유즈루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즈루 또한 이 디스커뮤니케이션의 굴레에서 빠져나온 캐릭터가 아닌데요. 등교도 거부하면서까지 열심히 언니 쇼코를 지키려는 유즈루가 왜 결국 쇼코를 지켜낼 수 없었는지. 그리고 이 디스커뮤니케이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사태의 책임은 어디에 물어야하냐는 제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디스커뮤니케이션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진 최대한 열심히 피해왔지만 이젠 '그 사건'을 이야기해야한다는 걸 예고드리면서,

<목소리의 형태> 세번째 이야기를 출발해 보겠습니다.


※ 이 포스트는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며,

동시에 이 작품의 원작 만화 [목소리의 형태]의 스포일러도 겸합니다. ※


! 중요한 이야기 !


이번 [목소리의 형태] 이야기를 하는 포스트 도중,

가끔씩 여러분들의 도덕적인 직관으로 뭔가 이상하다 싶은 발언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목적은 이 작품이 정말 말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본질에 제 나름대로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보기 위해서일 뿐,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도덕적으로 불편한 요소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목소리의 형태] 포스트의 시작마다 항상 안내됩니다.


언니인 쇼코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자는 생각으로 정작 자기는 잘 돌보지 못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유즈루는 언니의 옆에 서서 쇼코가 다치지 않기 위한 의심을 대신 해주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생각하는 게 유연한 캐릭터이기도 한데, 쇼야가 쇼코에게 그저 자기 만족으로 접근하는 게 아닐 것이란 가능성을 제일 먼저 열어두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죠. 이렇게 유즈루는 쇼야와 쇼코가 서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사를 무시하지 않는 선에서 대신 의심하거나 도와줌으로써 쇼코를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성숙하다는 느낌을 주는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유즈루의 장점이자 한계이기도 한데, 왜냐면 유즈루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은 찻잔 속 소용돌이처럼 근본적인 상황을 바꾸는 데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디오 코멘터리에서 나왔던 이야기에 따르면, 유즈루의 한계는 아직 '반항'이라는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는 특징에서 나옵니다. 어른처럼 생각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또 실제론 어떤 부분에선 다른 캐릭터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지만, 결국 유즈루의 행동은 그 나이대에서 생각할 수 있는 틀에 도전하고 반항하지 못 하는 한계를 지니게 되죠.



그래서 유즈루의 사려 깊은 행동은 오히려 쇼코를 자살로 밀어부치는 요인 중에 하나로 작용하게 됩니다. 엄마는 자신이 악역을 자처하며 과격한 방식으로 쇼코를 보호하겠다는 느낌이고, 유즈루는 등교까지 거부하며 쇼코를 보조하고 있는데 상황은 초등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나 별로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필 이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는데, 이 때 연출이 마치 할머니가 쇼코의 죽음을 대신해준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상황들을, 이제까지 계속 말씀드렸던 쇼코의 성격으로 읽어내면, 내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랑 연관된 이상 절대로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언니를 지키겠다는 유즈루의 행동이 오히려 쇼코가 자살을 생각하도록 몰아부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흐름이죠.



이 작품이 가슴을 꽉 조이는 답답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송신 오류라고도 불리는 디스커뮤니케이션 현상. 이 현상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한테 예외없이 붙어있습니다. 쇼코, 우에노, 카와이, 유즈루, 그리고 곧 이야기하게 될 쇼야와 사하라, 마시바, 나가츠카, 그리고 쇼야의 엄마와 쇼코의 엄마까지. 이들은 자신 앞에 놓인 상황을 잘 해결해보려고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표현하고 생각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상대방에게 제대로 닿은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봐도 됩니다.


제가 이 사태에서 제일 크게 책임을 져야할 사람을 초등학생 때의 선생님이라 생각하는 게 이 때문입니다. 오해가 되도록 말하고 또 말을 오해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사람이 가해자냐 피해자냐의 문제가 아니라면, 정말 큰 문제는 오해를 어떻게 풀 것이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반 친구들과 다른 점이 많은 친구인 쇼코를 오해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죠.


이런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는 느낌을 풍기더니, 쇼코가 다른 친구들과 이러저러한 다른 점이 있으며 그럼에도 충분히 가까이할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을 느끼게 해줄 최소한의 안내도 하지 않았고, 사태를 해결하려고 등장한 시점은 이미 반 안에서 쇼코를 향한 불편함이 싫어하는 감정으로 변질이 끝났을 때이며,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 선생님이 한 일이라곤 표면적인 가해자인 쇼야만을 모든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끌어내서 처벌한 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이마저도 나중엔 가해자였던 쇼야가 이번엔 피해자가 되어서 결국 또 다른 집단 괴롭힘이 만들어지는 원인이 되었죠. 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선생님에게만 적극적으로 책임을 묻는 건 선생님이 오해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중재자이자 모두가 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도록 지도해야할 책임이 있는 교육자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끝난다면, 아마 저는 이 작품을 디스커뮤니케이션의 이야기가 아니라 왕따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는 사회 고발 작품이라고만 기억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아름다운 작품이라 말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인데, 이 작품이 아름답게 기억되려면 이제 여기에서 또 한 걸음을 나아가야 합니다.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드디어 이 작품의 주인공, 이시다 쇼야입니다.

이 캐릭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이제 지금까지의 답답한 분위기를 바꿔 볼 시간입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