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읽어주는 낭인,
스카이포스터, 인사드립니다!
독특한 작품이 하나 등장했습니다. 애초에 2월 개봉 예정도 원래보다 미룬 계획인데, 같은 배급사(플레이무비/미디어캐슬)의 같은 2월에 예정되었던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夜明け告げるルーの歌》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3월 말이 다 되서야 본격적으로 개봉을 알려왔네요. 놀라운 일이지만, 4월이 다 되어서야 올해 제가 처음으로 보게 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되었네요!
이게 올해 극장에서 본 첫 애니메이션이 된 이유엔 슬픈 전설이 있습니다.
‘쏘불아옆’이라고... 개봉 1주일만에 상영관이 대거 탈락한 비운의 작품이 있습니다.
설마 1주일 안에 상영관이 그렇게 다 사라질지는 몰랐지...
개봉 날짜를 이야기하느라 사족이 좀 길어졌습니다. 유아사 마사아키湯浅政明 감독, 모리미 토미히코森見登美彦 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夜は短し歩けよ乙女》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봅니다.
(좌) 일본 포스터 / (우) 한국 포스터 (한국 포스터는 플레이무비 페이스북 제공)
유아사 마사아키(湯浅政明)를 구글 이미지에서 검색하면 볼 수 있는 화면.
일반적인 재패니메이션과는 노선을 달리해 아수라장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의 일러스트가 마구 쏟아져 나온다.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 자체가, 자주 접하게 되는 재패니메이션의 스타일과는 분명히 다른 개성을 보여주는 감독입니다. 작품을 다 볼 필요도 없이, 이 감독 대표작의 스틸 컷 몇 개만 봐도 ‘다르다’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옵니다. 기법적으로만 따지자면, 재패니메이션보단 오히려 《벤 10》과 같은 카툰 네트워크 계열의 서양 애니메이션과 결을 같이하는 표현법이 많죠. 판타지적인 ‘과장’을 마구 휘갈기거나, 많은 표현을 간략화해서 ‘상징’적으로 처리해버리는 것이 바로 이 감독의 스타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재패니메이션에서 ‘과장’은 거의 사용되지 않거나 혹은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어 비교적 ‘사실’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개성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죠.
판타지로 가정된 장면에서도 인간의 체형을 세심하게 재현하는 보통의 재패니메이션(상, 《빙과》)과는 달리,
‘이건 눈, 이건 다리, 이건 머리’ 같은 규칙만 잡아놓고
연출적으로 필요하다 싶으면 자유롭게 늘이고 줄이면서 ‘과장’해버린다(우,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원작 소설의 반영이 충실하네, 혹은 충실하지 않네, 같은 왈가왈부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습니다만, 그걸 떠나서 저는 원작이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찰떡궁합의 감독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판타지를 마치 문지방 넘는 것마냥 넘나드는 이 작품을 표현해내기에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만큼 적합한 인선이 없었다고 생각하네요.
모든 것들이 과장되거나, 혹은 다른 것으로 바뀌어 표현되면서 수많은 ‘상징’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이 작품에게 다소 난해하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표현이 무슨 의미인가를 고민하면서 머리를 좀 써야 이 작품이 재미있다고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작품이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상징은 다분히 일본의 고유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상징들이 일본의 토착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일본 문화에 지식이 있어야 이 작품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에서 사용한 일본 문화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문맥적으로 그 상징의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맥락과 조금만 맞춰보면, 반쯤 맞춰진 직소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의미의 자리를 맞출 수는 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직관적으로 확 다가오지 않을 뿐이죠. 외국 사람들에게 ‘김 첨지’ 이야기를 했을 때, 이야기를 듣다보면 ‘김 첨지’가 뭔가 비극적인 인물이구나 정도는 알게 되도, ‘김 첨지’라는 인물이 겪는 비극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는 잘 잡아낼 수 없는 것과 같겠죠.
아직까지 이 ‘달마’는 왜 나왔는지 조금 어렵더군요.
이런 생각하는 재미를 즐기시는 분에게는 괜찮은데, 흘러가는 대로 바로바로 접수되는 작품을 기대하신다면 이 작품을 접하는 것은 조금 고려해보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수시로 현실과 판타지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은 현실과 판타지를 한 화면에 같이 놓고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이 작품의 판타지적인 ‘과장’은 모두 이 작품이 던지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위한 장치라는 것이 각별합니다. 이 작품은 대학생이라는 신분과 그 신분의 나이대가 가지고 있는, 자기는 뭐든 다 될 거라는 자만스러운 허세를 유쾌하게 망가뜨리지만, 그 허세의 뒷면엔 ‘학생’이라는 아직은 보호받아야되는 신분과 사회가 이제는 자기 몫을 해야한다고 보는 ‘나이대’가 모순적으로 뒤섞인 ‘대학생’의 패배감이 있음을 건드립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과장’은 기묘한 위치에 서있는 이 ‘대학생’의 모순적인 부분을 유쾌하게 꼬집어서 결론적으론 ‘치유’하기 위해 존재하죠. 단순히 판타지적인 ‘과장’이 만화적인 재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완충 장치로써 사용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 보여주는 ‘과장’의 각별한 점이죠.
자료를 찾기 위해 잠깐 구글을 검색했다가 이 작품에 대해 평가하는 문서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래서 애니메이션이구나’라는 걸 간만에 느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그 글 보자마자 너무 크게 고개를 끄덕여서 목에 쥐났을 정도니까요. 뭐, 이건 농담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을 묘사하기는 해도 현실을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는 완벽히 창조된 것만이 구성되는 세계. 그것을 애니메이션이라고 본다면, 그 창조성을 활용해 현실을 마구 변형시켜놓고 그 변형이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써 작용하는 것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이 작품은 그런 애니메이션의 본질에 참 충실한 작품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뭔가 인연이겠죠.”
이 작품은 후에 더 할 이야기를 들고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작품의 결말이, 정말 이렇게 치유를 받을 수도 있구나, 하고 느꼈던 감동의 순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참 좋네요.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아, 그리고 하나자와 카나 씨의 목소리는 언제나 옳습니다. 이 감상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스포일러니까, 이번 포스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포스팅을 보러 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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