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스카이포스터입니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2주라는 시간도 금방이네요. 문득 ‘이거 두 번 더 업로드하면 개학이네?’라는 생각에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2학기 때 빡빡하게 수강 신청하고서 과제 처리하느라 고생길을 걸어서 그런지 개학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네요. 그다지 방학 때 쉬었다는 느낌이 잘 안 들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여튼 기묘한 기분입니다.
사실 저번 포스팅 업로드 시기에 일이 좀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일이 아니었어도 저번 [내멋대로 리뷰] 포스팅은 늦게 업로드될 예정이었기에 여전히 포스팅 업로드가 늦은 것에 대한 변명은 안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두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구요... 아무튼 원래 계획대로라면 후보 두 작품을 전부 예고하고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했는데, 그 일을 겪고서 어떻게 해서라도 오늘 작품으로 포스팅을 업로드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작품은 잊고 싶으면서도 잊고 싶지 않고, 시간의 흐름 때문에 자연스레 잊혀질 수 밖에 없으면서도 결코 머리 속에서 잊혀질 수 없는 이름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내멋대로 리뷰]의 4번째 손님,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으로 대표되는 지브리 스튜디오スタジオジブリ의 기록을 무섭게 갈아치운, 신카이 마코토深海誠 감독, 코믹스 웨이브ComicWave 제작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입니다.
※ 이 포스팅은 「너의 이름은.」의 스포일러 요소를 포함합니다. ※
1. 신카이 마코토
이 작품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 만의 특징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배경과 영상미라는 부분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작품인 「초속 5cm」秒速5センチメートル와 「언어의 정원」言の葉の庭 등에서 막상 마주쳤을 때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으면 애니메이션이라는 자각을 잠시 잊어버릴 만큼의 굉장히 사실적인 광원 효과와 배경 작화를 특기로 하고 있는 감독이죠. 그렇게 섬세한 광원 표현을 기반으로 한 사실적인 배경 작화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현실에 있을 법은 하지만 결코 자주 목격할 수 없는 신비로운 느낌을 가미하며 작품의 전체 분위기를 맞추는데 크게 기여하는 배경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이 감독의 주특기죠. 미술풍으로 따지면 빛의 방향 및 세기 등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는 순간을 포착한 인상파적인 기법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이죠.
작품 「언어의 정원」의 무대가 된 신주쿠 교엔新宿御苑의 모습은 애니메이션이란 자각을 잠시 잊어버릴만큼 사실적이지만,
흔히 포착할 수는 없는 색감이라는 점에서 신비한 느낌도 자아내고 있죠.
이번 작품인 「너의 이름은.」에서도 이런 영상미는 여전히 자신의 장기라는 듯 마음껏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작품의 시작과 함께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혜성의 낙하 장면은 「초속 5cm」에서 밤하늘에 로켓이 날아가던 그 장면을 연상시킬만큼 밤하늘 특유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고, 1200년을 주기로 돌아오는 티아매트 혜성이란 희귀도에 걸맞는, 저절로 옥상 위로 올라가 넋놓고 구경할 것 같은 아름다운 혜성의 모습을 그려내며 현실적인 느낌과 동시에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미츠하宮水三橋가 타키立花瀧로 몸이 바뀌고서 처음으로 접한 도쿄의 풍경은, 미츠하가 갈등 관계로 엮인 집안 사정과 얽혀 도쿄로 대표되는 도시를 강하게 동경하고 있던 그 심리를 제대로 보상해주려는 듯 사람들로 활기찬 도쿄의 모습을 아침과 점심 즈음의 햇빛을 이용해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죠. 그 외에도 노래 ‘전전전세’前前前世가 깔리며 타키와 미츠하가 몸이 바뀌는 며칠을 빠른 템포로 그려내는 부분에서 마치 자연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봤던 아주 긴 기간 동안의 영상을 몇 초 안으로 빠르게 재생해내는 기법을 사용하며 여전히 신카이 마코토의 장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특징은, 캐릭터들의 대사가 굉장히 적고 어지간한 심리 묘사는 주인공에 한정되어 독백으로만 드러내는 방식을 채택하는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에서 캐릭터의 심리를 대신 표현해주는 장치로써 작동하기도 합니다. 특히 바로 전 작품인 「언어의 정원」에서는 제일 극적인 부분에 제일 강한 빗줄기를 연출해냄으로써 드라마틱한 장면을 극대화하는 장치로써 사용하기도 했고, 때맞춰서 주인공의 감정을 겉으로 제일 폭발시킨 장면이기도 했죠.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캐릭터에 남는 게 없다는 약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가뜩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대사가 일반적인 작품들에 비해 매우 적은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에서, 나름 주역으로 봐줄 수 있는 캐릭터들의 이름들도 잘 안 떠오를 만큼 사실 캐릭터성에 대해선 남는 게 없다는 약점이 있기도 했죠.
정말 미안한 이야기인데... 너 이름 뭐였니...
하지만 이번 「너의 이름은.」은 다소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마무리에 육교 위에서 서로 지나치는 연출에서 이제까지 보여준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대사 없는 연출’을 다시 등장시켰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해 배경 중에 하나에 불과했던 캐릭터가 단독적으로 성격을 보유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신카이 마코토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주역으로 봐줄 수 있는 캐릭터들의 개성이 뚜렷하고, 또 제목에서부터 이름을 다루는 것과 걸맞게 타키와 미츠하의 이름도 마치 주문을 외우듯 각인시키고 있으며, 특히 혜성으로 인해 벌어진 재앙 상황 등등 이 작품을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의 주역인 미츠하의 캐릭터성은 이전까지의 신카이 마코토 작품에 비해 확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깐 언급했던 극후반의 육교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과장 좀 보태서 신카이 마코토는 이른바 커플 브레이커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쓰고 있는 감독이었습니다. 그래서 「초속 5cm」의 엔딩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육교에서 타키와 미츠하가 미묘하게 엇갈리며 스쳐가는 모습이 연출되는 것을 보고 아마 단단히 화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두 작품 「초속 5cm」와 「언어의 정원」에서 뒷맛이 미묘한 엔딩을 지속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하게 판을 펼쳐두고선 또 그렇게 끝낼 셈이냐, 라는 식으로 불안감에 떨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요!
만약 이것처럼 끝났으면 대부분 부글부글했을지도...
일부 연출에서 마치 신카이 마코토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뒤끝 미묘한 모습을 보여줄 뻔 하긴 했는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서는 ‘치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적어도 이제까지의 상징과도 같은 묘한 ‘열린 결말’로 마무리를 지을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대재앙에 대한 집단적인 트라우마, 스트레스성 외상을 자극하는 소재를 사용하면서 그 외상을 ‘치유’해주겠다고 공언까지 한 작품에서까지 그 엔딩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의미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감독이기도 합니다. 개봉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일본 현지 박스 오피스 최상위 순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중인데다가, 하루에 10~15만 명 씩 지속적으로 관객을 모으고 있어서 DVD 및 BD를 언제 내야할 지 감도 못 잡을 정도고, 일본은 정말 잘 되는 작품의 경우 1년까지도 스크린을 유지하는 사례도 있어서 사실상 초 장기 상영을 예견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추가적인 수단이 있음에도 영상만 놓고 보자면 몇 가지 허점도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이 작품 「너의 이름은.」이다보니,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이 작품의 1도 인정할 수 없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사람도 많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몇 인터뷰 발언 등등에서 좋게 말하면 특이하고 나쁘게 말하면 변태의 느낌이 묻어나는 발언을 하기도 해서 「너의 이름은.」이라는 작품 하나에서도, 그리고 감독 자체도 이래저래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흥행 성적과 주관적인 평가들이 이 작품에 가해지는 여러 비판을 무색하게 만들만큼 작품의 평가를 높게 견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작품에서 나오기에는, 깊은 메시지와 더불어 예술적인 경지를 보여주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기록을 말 그대로 ‘무섭다’고 할만큼 따라잡았고,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기록을 세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의 자리마저 넘볼 수 있을만큼 초 장기 상영이 예견되어 있는 이 상황까지 설명할 수 있는 형용사는 아니라고 봅니다. 특히나 일본의 경우는 동일본 대지진-일본 공식 명칭은 토호쿠 대지진東北地方太平洋沖地震-이라는 전국민적인 재앙의 모습을 연상하도록 연출하고, 그리고 그것을 ‘미리 알았다면 뒤집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치유의 메시지를 담아내며 전국민적인 공감을 얻어냈죠.
사실 이제까지, 특히 「초속 5cm」의 엔딩에서 ‘이게 무슨 엔딩이야’라는 식으로 화를 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이 바랐던 엔딩을 배신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과장 좀 보태서, 공감 능력이 다소 부족한 것이 아닌가, 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전국민적인 공감을 일으킨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에서 「너의 이름은.」은 분명히 신카이 마코토의 성장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거라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처음으로 배경만이 아니라 생동감있게 움직이는 캐릭터들도 기억에 남긴 작품이라는 것이 그 이유고, 두번째는 이제까지의 작품에서 보여준 뒤끝 미묘한 엔딩이 본인의 실연 경험을 그린 것이단 일종의 복수심(?)에서 일어난 엔딩이라는 이야기를 사실이라 받아들였을 때 ‘커플 브레이커’라는 자신의 오명 아닌 오명을 뒤집어낸 점이 이 작품을 신카이 마코토의 성장이라고 보는 이유입니다.
2. RADWIMPS
음악이라는 요소는 제가 영상 컨텐츠에서 제일 관심있는 부분이지만, 특히나 이 작품은 음악이라는 요소를 더 강조해서 말씀드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어학 연수 시절에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 RADWIMPS라는 밴드를 소개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죠. RADWIMPS의 보컬 노다 요지로野田洋次郎의 기교가 없어 꾸민 것 같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가 십대 특유의 날것과 비슷한 것을 연상시켜 신카이 마코토가 마음에 들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고, 이 작품에서는 전 OST에 RADWIMPS가 참가했죠.
전부 RADWIMPS의 손에서 만들어진 「너의 이름은.」의 OST
신카이 마코토가 각본을 작성해서 RADWIMPS에게 넘겨주면 RADWIMPS가 그 각본을 토대로 노래를 작곡하고 그 곡을 받으면 신카이 마코토가 그 곡의 가사와 분위기에 맞춰 또 영상을 수정하고 곡의 구성에 맞춰 대사 타이밍과 연출 타이밍 등 세세한 부분을 조정하며 만들어져 사실상 제2의 각본가이자, 이 작품의 숨겨진 성우라는 평가를 받고 있죠. 그만큼 단독곡으로도 가치가 있으면서도 그야말로 「너의 이름은.」이라는 작품만을 위해 탄생한 특별한 곡들로 큰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의 이름은.」의 OST에서 타이틀 곡으로 선정된 곡은 ‘전전전세’입니다. 여러 해석에서 언급하고 있듯 ‘전세前世’는 전생前生을 의미하고 있고, ‘君の前前前世から僕は君を探しはじめたよ(너의 전의 전의 전생부터 나는 너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어)’라는 후렴구 가사가 본격적으로 타키와 미츠하가 몸이 바뀐다는 사실을 인식한 후의 빠른 템포로 넘기는 장면에서 등장하면서 신나는 템포와는 다르게 미묘하게 암시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며 이 장면이 단순한 그 의미 이상일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YouTube 링크 :: RADWIMPS "前前前世 (Movie Ver.)" 뮤직비디오
물론 '전전전세'가 타이틀 곡이기도 하고, '전전전세'라는 후크송과도 같이 뇌리에 잘 기억되는 가사 채용에 제일 대중적인 템포, 거기에 운명적인 암시까지 담아내 스토리와도 맞아떨어지면서 제일 유명한 곡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전전세보다는 '스파클'スパークル이라는 곡에 더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바로 아실 수 있다시피 영어 단어 sparkle이고, '반짝이다' 혹은 '불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곡이 흐르는 장면은 작품의 초반 타키가 넋을 놓고 쳐다보게 만들었던 티아매트 혜성의 아름다운 장면이 다시 한 번 재생되는 것과 대비된, 마을 하나가 통째로 날아갈 재앙을 타키를 통해 알아낸 미츠하가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비추는 장면이죠. 그리고 노래가 끊어지는 순간, 효과음은 아주 약간의 무음 이후 마을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장면과 그 소리를 담아내기 시작하죠.
처음에는 누군가는 그것을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라며 넋 놓고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누군가는 그것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재앙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스파클'이라는 피아노 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잔잔한 멜로디와 절체절명의 순간과 대비되는 희망적인 가사를 담아내는 곡을 깔며 미묘한 연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전전세'가 타키와 미츠하가 운명으로 묶인 것을 암시하는 가사를 깔았던 전적이 있는 만큼, '스파클'의 가사에서 마지막, 'そんな世界を二人で一生、いや、何章でも生き抜いていこう(그런 세상을 둘이서 평생, 아니, 몇 번이라도 살아나가자)'이란 가사에 주목해, 신카이 마코토가 이 작품으로 '치유'를 그리고 싶었다는 것까지 접목시켜서 해석을 하면 이 장면에 이것만큼 어울리는 곡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츠하의 노력으로 마을 사람 전부가 몰살당하는 것은 막았다고 해도 삶이 터전이 몽땅 망가진 것이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츠하를 필두로 이토모리糸守町 마을의 모두가 몰살 당하는 것을 막으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부터도 타키를 비롯해 전 일본 사람들이, 더 나아가 전세계 사람들이 아름다운 혜성을 보고 있는 모습과 나란히 배치한 것은, 일어나지는 것 자체를 막을 수 있는 재앙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흔치 못한 혜성의 모습을 목격한 것과 같은 기적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토모리의 혜성 낙하 사건에 인명 피해는 없었고, 타키와 미츠하도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 흐릿한 기억을 강렬한 직감으로 바꿔내며 결국 재회하는 것에서 그 장면은 '스파클'이란 곡이 흐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해봅니다.
YouTube 링크 :: RADWIMPS "スパークル (Original Ver.)" ~君の名は。MV Edition~
OST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의 의견이 적은 건 사실이나, 노래가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주제이자 목소리를 확실하게 자리잡아두고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노래를 위해 작품을 끼워맞춘 느낌이라고 의견을 밝히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작품은 신카이 마코토와 RADWIMPS의 공동 작업이기 때문에 '끼워맞췄다'고 보긴 다소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OST의 주제성이 너무 강해 집중이 분산된다는 의견의 다른 용어라면 그럴 여지는 충분히 있었을 거라 생각은 합니다. 어쨌든 일반적인 영화와는 여러 모로 다른 문법을 취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라 한두곡 정도가 메인으로 서고, 그마저도 장면 안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일반적인 음악 사용법에 비해서 주제성이 도드라진 이 작품에 OST의 사용이 다소 과해보인다는 비판은 어느 정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OST 사용이 좋게 작용했을지 나쁘게 작용했을지는 개인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이런 의견도 있었다는 식으로 저는 언급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3. 비판에 대한 지극히 내멋대로인 이야기들
여기서 잠깐, 이 작품을 향해 나왔던 몇 가지 비판들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의 의견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 작품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보시는 분에 따라서 이 파트는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이어야한다는 변명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위에서부터 계속 이 작품은 이래저래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긍정적인 입장은 굉장히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은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며 굉장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도 양쪽의 입장이 정당히 비판들에 한해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저는 그 의견의 차이를 존중합니다. 다만 이 파트를 전개하는 것은, 어차피 제가 여기에서 이렇게 줄줄 늘어놔도 비판적인 입장인 분들인 비판적일 수 밖에 없으실 겁니다만,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하나의 의견이라고만 받아들여주시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적어봅니다. 위에서 미리 언급했던 일부 비판점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습니다.
첫번째는 상업적인 성적을 염두에 두고 나온 작품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 현지에서는,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전국민적인 불안과 스트레스성 외상을 일으킨 사건을 소재로 그 사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작품이라는 것은 너무 과도하게 억지적이지만 않다면 정말 잘 먹힐 수 밖에 없는 카드를 사용했다고, 정말 냉혹하게 보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상업적인 카드를 사용해 노리고 나왔다라고만 언급하고 넘어가기엔 객관적으로는 흥행 성적이 너무나도 터무니 없이 높고, 주관적으로는 2~3번 이상 봐도 안 아까웠다고 말하는 관객을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점까지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봅니다. 주기적으로 극장가에 등장하는, 재난을 소재로 하는 영화가 나올 때마다 주목을 받고 경각심을 일깨우긴 하지만 그 관심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는 드문 것을 생각하면 재난이라는 노림수 카드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상업적으로 노린 부분'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채는 상황에서, 대놓고 상업적으로 노렸다고 작품 내내 인증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스토리 컨텐츠의 지속성과 인기는 비단 노려진 상업성만으로 유지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두번째는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모자라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 중 특히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는데 납득할 만한 시간과 사건들이 없었다는 것이고, 일련의 모든 상황에 대한 근거를 '무스비結び'(맺어짐)라는 것으로 전부 땜빵하고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것이 크게 제기되는 의견입니다. 이 작품의 여러 비일상적인 사건들에 대한 설정은 신카이 마코토가 쓴 '너의 이름은' 소설에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영상을 먼저 접하고 영상의 여운에 따라 텍스트를 선택적으로 입수하는 것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소설에 모든 설명이 있습니다, 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영상에 납득할 만한 연출을 다 담아내지 못 한 것은 분명히 한계로 지적해야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감독의 스타일로 보았을 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논리적으로 작품을 꽉꽉 채워맞추는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논리적인 부분은 적당히 맞추고 나머지는 감각적으로 계속 자극시키는 순간적인 감정과 하이라이트 연출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대단히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스타일에 가깝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의견이 당연히 감독에게도 제기되었는데, 감독은 '정말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달라고 할때, 그냥, 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곤 하는데, 이와 같이 마음에 들어하는 것에는 논리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는 느낌으로 발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당화 발언이라는 비판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에는 이성이 간섭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마냥 논리를 들이대기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나 좋아하는 데는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남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것은 다소 말이 안 맞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논리적으로 정말 모두가 우연이고 끼워맞췄다고 한다면 또 그것도 아닙니다. 타키가 미츠하를 다시 만나기 위해 과감한 실행력을 보여준 것에 대해선, 타키가 한때 짝사랑했던 사이인 오쿠데라奥寺ミキ 선배의 말을 인용해, '연약할 것 같으면서도 불의에 나서는 성격'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츠하를 되살리려고 할만큼의 행동력을 보여줄 인물로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외에도 혜성 사건을 해결하는 부분에서 몸이 바뀌는 현상이 미츠하 뿐만이 아니라 대를 이어서 소녀 시절에 모두가 겪었다는 것, 신사 안에 그려진 혜성의 그림 등등 이 정도면 모자라지는 않은 장치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결론을 짓자면, 이 정도 논리성이면 괜찮다면 모든 상황이 납득 가능한 상황이 될 것이고, 이 정도는 부족하다면 숨가쁘게 하이라이트 장면을 연출해내는 이 작품에 공감할 시간이 조금도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번째는 신카이 마코토의 장기가 발휘되지 못 했다는 언급입니다. 저는 작품의 처음에 등장했던 혜성 낙하 장면에서부터 역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게 장기였지, 하는 인상이 강해서 잘 눈치채지 못 한 부분이었는데, 인물 쪽 작화를 유심히 보고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인물까지도 수채화 비슷한 느낌으로 꼼꼼하게 광원 효과를 주던 작화가 이번 「너의 이름은.」에서는 잘 발휘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그만큼 여러 광원 효과를 낼 수 없는 밤이 주로 배경이 되어서 그런 것도 있으나, 미세하게 꼼꼼하지 못 한 모습이 특히나 인물을 중심으로 한 작화에서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둘의 배경은 다른 배경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비교는 될 수 없지만,
비 오는 어두운 날씨에도 희미하게 빛을 잡아내던 표현에서 살짝 힘을 뺀 것 같은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이제까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에서 '캐릭터'는 남지 않았다는 것을 봤을 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저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대단한 발전이라고 봅니다. 보여줘야 할 배경 작화는 여전히 모자람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거기에 전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환상적인 작화와 연출도 호소력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퇴보라기보단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타키가 구치카미사케를 마시고 마지막으로 미츠하와 몸을 바꾸기 직전에 빨간 끈을 중심으로 미츠하의 기억을 훑어나가는 타키를 보여주는 연출에서 현실에 완전히 기반하지 않은 연출도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 저는 이 작품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전의 신카이 마코토 스타일을 좋아했던 팬들에게는 불만 사항이 될 수 있을 부분임에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마지막으로 일부 페미니즘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해서입니다. 이 의견에 대해선, 제 성별은 남성이기에 여성의 입장이 되서야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솔직히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말이 안 될 겁니다. 함부로 말할 자격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정도는 할 수 있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 사회 안의 일로, '카와이(かわいい, 귀엽다) 문화'에 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본 매체를 접하다보면, 우리나라 말로는 "예쁘다", "아름답다"는 단어가 나올 타이밍에도 "귀엽다"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되는데, "귀엽다"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주로 돌봐줌이 필요한 어린이에게 사용되는 단어인 만큼 순종적인 여성상을 요구하는 단어라 보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공식 배포판 번역 자막에선 '여성스러운 부분이 있네'라며 의역되어 번역되었지만, 직역은 "여자력이 높네"女子力が高いね로 "여자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얼마나 '이런 여성스러운 모습'에 부합하는 '능력치'가 되느냐, 라는 기묘한 합성어라는 지적을 받고 있죠. 워낙에 기저에 깔려있다보니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힘들고, 또 일본 사회가 역사적으로 대격변을 통해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갈아엎는다기 보다는 명분은 유지하면서 하나둘 수정해나가는 사회에 가깝기 때문에 인지하더라도 갑자기 모든게 바뀔 가능성은 낮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본 내부에서 저런 비판이 공개적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만으로 일본 내부의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뤄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타키와 미츠하가 뒤바뀌며 남성적인 여성과 여성적인 남성이 오히려 인기가 많은 모습을 보여주며 남성다운 남성과 여성다운 여성의 틀을 깨고 싶었다고 언급했고, 둘의 몸이 바뀐 연출에서 오히려 여성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오쿠데라 선배의 맘에 들게 되었던 타키와 남성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때가 남자에게건 여자에게건 고백을 더 많이 받는 미츠하의 모습을 등장시키며 그 의도가 있음은 확실하고, 따라서 오히려 양성 평등에 가깝게 의도했다는 것도 알아두시면 괜찮겠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내봅니다. 한국에 비해 좀 더 성에 개방적인 일본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컨텐츠라, 대놓고 성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컨텐츠를 제외하곤 익숙하지 않다면 성적인 묘사가 더 있어보인다고 생각하는 분은 있을 수 있겠네요.
4. 「너의 이름은.」 신드롬에 대해
수많은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또한 수많은 비판도 받아온 이 작품 「너의 이름은.」입니다. 위에서의 비판점도 많았고, 한국 한정으로 일부 관람객들의 태도 문제나 일본 특유의 정서나 컨텐츠적인 문법이 안 맞으면 생기는 문제도 있기에 일본 현지에서보다 더 확연한 온도차를 보이는 작품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을 단순히 좋고 싫고의 온도차가 큰 작품이라고만 설명하기엔 흥행력이 너무나도 압도적입니다. 일본 현지의 사정은 어쩌면 1년동안 상영이라는 초장기 상영 체제로 돌입할 가능성까지 예측할 정도라고 언급을 드렸으니 현지의 지지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상황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나 일반적인 극장 개봉 애니메이션과는 다르게 영화 관람에 특전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특전 이벤트(27일부터 메가박스에서 선착순으로 스페셜 리플렛을 증정하기 시작했음)를 시작하기 전에도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모으고 15회차 관람객이라는 어마어마한 분이 등장할 만큼 흡입력을 이끌어낸 상황까지 묘사할 수 있는 수식어는 되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지간하면 영화관에서는 한 번 보고 끝내는 저도 첫 관람 이후에 곧장 두번째 관람을 생각한 첫 작품이었고, 좋은 시각보단 비판적인 시각을 우선 쏟아내는 지인들조차 2회차 이상 관람하신 분들이 많아서 이 작품을 지지할 수 없는 분들이 이토록 이 작품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인 것은 단순히 이 작품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할만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실 이야기는 별반 새로울 것이 없는 작품입니다. 남녀가 몸이 바뀐 상황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시간의 차이라는 소재에서 자주 봤던 이야기 구조에, 이야기 흐름도 딱히 예상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작품이 아닙니다. 단정지어 말하면 클리셰 모음집에 가깝다다고 할 수 있고, 굉장히 냉혹하게 말하자면 연출들도 많이 봤던 연출들을 활용하며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이런 부분에서 시작해 위에서 언급했던 일부 비판적인 시각들이 파생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에서 감독의 스타일에 대해 언급했듯, 논리적인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고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감각적인 하이라이트를 쉴새없이 몰아치는 스타일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으로 느낀 것은 뒷장면을 앞에서 미리 보여주는 기법은 말 그대로 기법적인 측면이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궤도에 올리는 그 다음 미츠하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첫 장면부터였습니다. 이곳에 평상시의 타키와 미츠하에 대한 언급과 캐릭터 설명이 주어진 뒤에야 둘의 몸을 바꾸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반적인 스토리의 흐름인데, 이 작품은 그 언급마저도 잘라버리고 타키가 미츠하의 몸으로 변한 상황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스비라는 할머니의 언급과 몇 가지 복선 장면을 통해 사건의 연결 고리는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만 만들어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의 하이라이트와 스토리의 진행에 정말 필요한 부분의 연출에만 집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이러다보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그 순간 모든 장면이 하이라이트로 전환되며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는 것이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명장면 몇 분, 명대사 몇 줄에 감각적으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영상과 이미지 위주의 세대에 걸맞는 굉장히 트렌디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죠.
신카이 마코토의 CF 모음 (YouTube 영상 링크)
신카이 마코토가 만든 광고를 모은 영상인데, 이 영상을 보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감각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실 지 모르겠습니다.
이 점 때문에 논리성을 중시하는 분들에게는 이 작품의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할 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곤 하고, 으레 관습적인 느낌으로 있어야할 법한 장면까지도 등장시키지 않는 이 작품은 불친절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쓸데없는 장면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작품은 전체적으로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고, 남녀간에 몸이 바뀌면서 생기는 경쾌한 에피소드는 사실상 페이크에 가까울 정도로 재앙과 그 재앙의 구원에 대한 절박한 소재를 담은 이 작품에서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은 상당히 흡입력 있는 연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비주얼, 특히 배경 작화에 관해선 검증된 신카이 마코토의 작화 스타일과 제2의 주제라고도 불리며 존재감을 드러낸 좋은 OST 곡들, 그리고 전략적인 효과음의 사용이 돋보이며 귀와 눈을 필두로 한 감각적인 장면을 휘몰아치며 이른바 '소름돋는' 연출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신카이 마코토의 연출력이 호소력있는 메시지와 결합되며 폭발적인 지지도를 얻고 있는 작품이 바로 「너의 이름은.」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혜성이 이토모리 마을로 낙하할 때 화면이 암전되며 묵직한 종소리 비슷한 것이 울렸던 그 연출이 정말 기억에 남네요.
이전 제 포스팅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언급한 것이지만, 저는 이젠 정말 이제까지는 나온 적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 나올만한 이야기들은 다 나왔고, 고전을 지금 봐도 '이 시대부터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고?'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이 작품이 괜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그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정말 대놓고 따라하는 것이 아닌 이상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는 어떤 사람이 자신과 정말 똑같은 생각을 해서 정말 똑같은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문제는 이제까지 없었던 이야기였냐, 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 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주얼, 음악, 효과음의 감각적인 강조를 몰아치는 스타일인 「너의 이름은.」은 장점도 단점도 충분히 참고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봅니다.
5. 만약 그랬다면, 에서 시작하는 치유의 이야기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2011년 3월에 발생한 일본의 대재앙인 토호쿠 대지진, 즉 동일본 대지진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혜성이 낙하한 것으로 폐허가 되어 아예 사라진 마을 취급을 받게된 가상의 마을, 이토모리 마을의 모습은 쓰나미와 그에 연계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폐허가 되어버린 미야기 현 등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지진 대비 훈련을 철저하게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도 6.0에서도 집안의 모든 기물이 제자리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흔들리는데 이 날 지진의 진도는 7.0이었고 해안을 진원지로 하는 이 지진이 쓰나미를 일으켰고 그 쓰나미가 후쿠시마 원전에 사고를 일으키며 마을 하나를 쓸어버리는 모습에 사람이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였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굳이 따지고 들어가자면 원전이라는 인재 요소가 결합되어 순수 자연의 대재앙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근본적인 원인이 강력한 지진이었다는 점에서 인용한 NHK 리포터의 말처럼 한낮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력하게 당하게 있을 수 밖에 없는 재앙이었죠. 저는 당시에 쓰나미가 몰아치는 것을 뉴스에서 해주는 것을 봤는데, 자동차를 몰아 쓰나미 바깥으로 도망치던 자동차가 결국 어떻게 해서도 쓰나미보다 앞서갈 수 없음을 알고선 자동차가 그 자리에서 멈춰서버리고 망설임없이 쓰나미가 그 자동차를 뒤덮어버리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가족들과 함께 그 장면을 보면서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기에 그 지진의 당사자인 일본 사람들에게 동일본 대지진은 집단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불안감이자 스트레스성 외상이 되고도 남는 사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 나라를 주도로 여러 가지 대비도 해왔건만, 그 정도 강도의 지진 앞에서 그 대비가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 그것도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혹자는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며,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이, 설령 내가 지금은 살아있다고 해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은 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그 재앙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무고한 희생은 없지 않았을까?"
「너의 이름은.」의 치유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은 혜성 낙하 사건으로 폐허가 된 이토모리 마을을 연출하며 감히 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고 재앙인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리도록 건드립니다. 그런데 한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는 대재앙을 불러운 것이 1200년마다 한 번 볼 수 있는 희귀하고도 아름다운 티아매트 혜성입니다. 방송은 연일 그것을 기대하며 들떠있고, 신카이 마코토의 장기인 영상미도 이 혜성을 아름답게 그리는데 힘을 쓰고 있습니다. 재앙의 근원을 아름답게 그리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재앙의 근원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남녀의 몸을 바꾸는 것에 한 가지 진실을 추가로 밝히는데, 그것은 바로 몸이 바뀌는 시점에 3년의 시간차가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이미 이 세상에서 존재가 지워졌지만, 지금 내가 몸을 바꾸고 있는 3년 전의 존재는 아직 살아있다는 기막힌 부분이죠. 그리고 3년 전에 발생할 일을 미리 본 타키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듯 존재하는 기억을 쫓아 '황혼의 시간黄昏時'이라는 기적의 시간에 3년이라는 시간차를 초월해 이토모리 마을에 벌어질 재앙의 결과를 완전히 반전시키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 때, 흐르는 음악이 '스파클'이고 재앙을 불러올 이 혜성을 왜 모든 사람들은 넋놓고 아름답게보고 있는 것에 재앙을 겪을 운명인 이토모리 마을의 사람들도 끌어들여 1200년마다 한 번씩 볼 수 있는 티아매트 혜성의 기적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로, 「너의 이름은.」은 인간이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재앙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너의 이름은.」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이 부분에서 온 것이 아닐까요.
상황을 대반전시키는 인물로 고등학생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꽤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비단 이 작품 뿐만이 아니라, 우스갯소리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극한 직업은 학생이라 말할 만큼 온갖 사건을 겪으며 고통받고 그것을 해결하는 주역으로 학생을 주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중2병이라고 하는 것을 다들 아실텐데, 이것은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면서 자신이 발현하는 불안정한 나 자신과 이상으로 하는 타인이 내 안에서 뒤섞이며 마치 내가 그 타인이 되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된 것을 말합니다. 결국 사춘기라고 하는 청소년기는 정체성 확립의 시기에 현실과 꿈이라는 경계 사이를 불안하게 넘나드는 시기죠. 현실에서 내가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존감과 역으로 내가 이 정도도 할 수 없다는 열등감에 내가 이상하는 타인을 자신에게 심어두며 안정을 찾으려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소녀 시절 신기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단다.
꿈에서 누가 되었는지, 지금은 그 기억이 사라져 버렸지만...
소중히 하거라, 꿈은 눈을 뜨면 언젠가 사라지니까."
몸이 바뀌는 것은 마치 꿈과도 같은 것이고, 타키와 미츠하도 처음 몸이 바뀌었을 때는 그저 평소 꿈보다는 훨씬 생생한 꿈이라고만 생각했다는 것에서 그 기억을 해내려 발버둥치지 않으면 그대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꿈의 형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꿈을 모두 불가능하거나 혹은 모두 가능한 것으로 끌어안는 학생의 경우라면, 그냥 내가 3년 전 이 세상에서 사라진 여자가 되는 꿈을 꿨구나, 하고서 단순히 넘어가지는 않겠죠. 이걸로 뭘 할 수는 있나하는 열등감과 동시에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면 이것을 통해 무언가를 뒤집을 수도 있겠다는 자존감이 함께하면서, 오쿠데라 선배가 말한 '여리면서도 불의에 참지 못 하고 나서는' 타키의 성격과 맞아 타키는 전력으로 3년 전의 과거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죠. 그것을 단순히 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둘을 직접 찾아나섰다는 점에서 타키 뿐만이 아니라 미츠하도 강렬한 꿈의 열망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미츠하가 집안 사정을 물론이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칙칙한 시골에서 벗어나 도쿄의 잘 생긴 꽃미남으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강렬한 바람에서 시작해, 둘 다 그것을 단지 꿈이라고만 생각하고 무시하지 않은 채, 물론 서로에게 몇몇 민폐 상황은 주긴 했으나, 서로의 동경을 이뤄주는 모습에서 둘은 강력하게 연결되었을 것입니다.
"다음 생애엔 도쿄의 꽃미남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거기에 받아들이지 못 하는 사람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무스비', 즉 맺어짐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의 절반을 담은 구치카미사케를 타키가 취함으로써 꿈을 현실에 등장시키는 일을 기어코 해내게되는 것이죠. 역시나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있는 친구인 카츠히코勅使河原克彦와 사야카名取早耶香, 애칭 텟시와 사야쨩 또한 재앙을 기적으로 바꾸는 꿈에 동참한 중요한 동료였구요. 이런 이유로 학생은 이 작품 뿐만이 아니라 여러 애니메이션에서 주역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짝 해봤습니다. 이렇게 생각보다 여러 설득력 있는 소재와 상황을 주고서 한 마을의 재앙을, 더 나아가 내 나라 안에서 벌어진 재앙을 막아내고 또 그 소중한 사람과 이어지는 모습으로 치유하는 이야기를, 신카이 마코토의 감각적인 영상미와 연출을 그릇으로 담아내고 그것이 치유하는 이야기로 굉장히 유효했을 거란 이야기를 전해봅니다.
6. 잊혀지면서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제목에도 등장하고, 타키와 미츠하가 온갖 악을 써가면서 기억하려고 했던 것은 이름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그리고 소개할 때, 대부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이 이름인만큼 이름이야말로 그 사람을 기억하는 제일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타키가 미츠하의 존재가 소멸되었다는 것을 알고 미츠하와 몸이 바뀌었던, 미츠하의 기억을 제일 생생하게 알고 있는 그 타키가 미츠하에 관련된 기억 뿐만 아니라 미츠하라는 이름마저도 기억해내지 못 하기 시작합니다. 확실한 기억은 잊어버리고 그랬던 것 같은 감각만이 남은 상태에서 타키는 그 감각을 치열하게 손에 넣었다 놓쳤다를 반복하죠. 타키가 그 감각의 실마리를 어떻게든 잡아내 황혼의 시간에서 기적과도 같이 만나고 서로의 이름을 적어내 기억하려고 했던 그 순간, 짧디 짧은 꿈과도 같은 황혼의 시간은 끝나고 미츠하라는 이름 중 획 하나만 적은 채 사라진 미츠하의 이름을 되뇌이며 적으려고 하지만 타키는 또 다시 미츠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구하기 위해서 왔어, 살아 있어줬으면 했어.
누구야? 누구? 누구를 만나러 왔지?
소중한 사람. 잊고 싶지 않은 사람. 잊으면 안 되는 사람!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이름은?"
미츠하는 타키의 이름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한 채로 역시 타키의 이름을 되뇌입니다. 하지만 이토모리 마을의 재앙을 바꾸는 도중 미츠하는 타키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마지막 보루로 당연히 자신의 이름이 써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오른손에는 얄궂게도 '좋아해'라는 세 단어가 적혀있었죠.
"이래선, 이름을 알 수 없잖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타키는 미츠하의 이름이 점점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을 뻔해 알고도 미츠하의 손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좋아해, 라는 단어를 적어넣었죠. 이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잊어버릴 뻔했지만 다시 기억해냈으니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을거란 자신이 있었다는 것과 이름을 써야하는 걸 뻔히 알고서도 그 잠깐의 시간에 내 이름 말고 제일 먼저 전하고 싶었던 것이 '좋아해'라는 단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전자라면 위의 청소년기에 관련된 이야기와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이고, 후자라면 이 작품의 하나의 비판점이 되었던 그저 서로 몸이 바뀐 일로 묶인 관계를 넘어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넘어섰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셈이죠. 혹은 둘 다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보다 좋아해라는 이름을 먼저 기억하고, 다시는 안 잊어버릴 수 있도록 확실히 기억했다고 생각하는 장면의 뒤에 연결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다시는 서로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없을 만큼 잊어버린 점이 비극적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에서 다시금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보이는 반응은 회피 심리입니다. 그 사람을 다시는 만나볼 수 없다는 인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그런 게 아니라며 부정하기에 마련이고 소중했던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기에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사라진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서 먼저 사라집니다. 이토모리 마을에서 재앙으로 사라진 미츠하라는 소녀를 제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타키의 기억에서 미츠하라는 이름이 제일 먼저, 그리고 강렬하게 사라지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슬픔의 역설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또 이와는 다르게,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감각은 유지되곤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와 같이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 사람은 더 이상 대답이 없는데 그 상황을 인정할 수 없다면 의도적으로 그 이름을 지우지만 의도하지 않았던 순간 뜬금없이 기억 속에도 없던 그 이름이 내 입으로 되돌아오고 맙니다. 결국 그 빈칸은 어떻게 해서든 지워지지 않고, 그들의 독백처럼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은 감각만큼은 끈질기게 내 옆에 자리하게 되어버리고 말죠.
잊을 수 없고 소중한 사람의 이름이라고 타키는 외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둘러싼 일은 너무나도 슬퍼서 한 편으로는 잊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죠. 문득 잠을 깼는데, 그리고 문득 거울을 봤는데 이유 없이 눈물 흘릴만큼 슬프고 괴로운 기억을 언제까지고 가지고 있는 것은 힘든 일이기에, 멀리하면서도 멀리하려는 역설적인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죠. 이것을 동일본 대지진으로 치환한다면, 미츠하가 대지진에 희생된 사람, 타키를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이라고 일본 내의 전국민적인 상징으로도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기적이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또 한 번 상실과 죽음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죠. 다시 말해 기억과 상실의 사이를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그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치열하게 기억해내는 것. 무스비, 즉 맺어짐을 통해 결국 기적을 일으킵니다. 물론 재앙이 일어났다는 사실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으나 그에 따른 희생자는 없었다는 결말을 보여주죠. 그 이후에 이 둘은 완벽하게 소중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는 감각만 남게 됩니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문득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첫 장면을 마지막에도 등장시키며 슬픔의 잔재는 계속해서 남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작품이 대놓고 희망찬 가정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초속 5cm」에서 짙게 보여줬던 슬픔의 감정 연출도 끌어내며 슬픔 또한 안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모두가 가지고 있는 슬픔까지도 끌어안으며 슬픔을 이겨내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다행히 이런 망각의 늪을 넘어서서 이 둘이 재회하는 엔딩으로 그려지며, 어쩌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관객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결말을 선사했습니다. 이렇게 「너의 이름은.」은 희생자와 남겨진 사람들이 보고 싶어했던 기적과 그 사람들의 잊을 수 없는 슬픔까지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죠.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괴롭지만 잊어버릴 수 없고, 잊혀지지 않고, 절대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도, 결국 그 기억마저도 살아가는 양분이 될 수 있음을, 그런 슬픔을 받아들여야하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선물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7. 숨겨진 것들 모아보기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아마도 몇몇 콘텐츠를 통해 이미 접하신 적이 있을 지도 모르는 숨겨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의 이름은.」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단연 두 사람이 몸이 바뀌었다는 것과 그 시기에는 3년의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중반을 넘어서며 이 작품은 이 소재를 전면에 드러내며 말하지만, 몇 가지 조그마한 복선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죠. 먼저 둘의 핸드폰 모델이 시간 차를 드러내고 있는데, 미츠하의 스마트폰 모델은 아이폰5를 형상화하고 있는 반면에 타키의 스마트폰 모델은 아이폰6를 형상화하고 있죠. 기종의 차이로 인해 둘의 시간차는 장면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바이긴 했습니다.
두 번째는 타키의 오른손 손목입니다. 중반에 본격적으로 집중해서 보여주지만, 그 전부터 타키가 타키일 때 줄곧 타키는 손목에 매듭 묶음을 팔찌처럼 하고 있었죠. 미츠하가 타키로 바뀌었을 시점에는 미츠하가 그 점을 인식하지 못 해서 손목에 매듭 묶음을 차고 있지 않고 있고, 매듭의 모양새가 미츠하가 머리에 매고 있던 모양새와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봤을 때, 타키와 미츠하가 어느 정도 연결되고 있었다는 숨겨져있던 복선이었죠.
이 때 당시에는 없었던 타키의 오른손에 있던 매듭
중후반부, 미츠하의 할머니 히토하宮水一葉의 증언으로, 그리고 미츠하의 아버지 토시키宮水俊樹의 언급을 통해 할머니도, 어머니도, 그리고 자신의 선조도 쭉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 누군가와 몸이 바뀐 적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에서 미츠하의 집안 내내로 내려온다는 언급이 있죠. 이것이 사실 이름으로도 형상화가 되어있는데, 할머니 히토하, 어머니 후타바宮水二葉, 딸 미츠하와 요츠하宮水四葉를 이름으로 나열하면 一葉, 二葉, 三葉, 四葉, 즉 1-2-3-4의 구도가 되고 있죠. 이렇게 집안 내력으로 겪고 있다는 것이 이름으로도 넌지시 던져지고 있는 셈이죠.
다음은 일종의 이스터 에그라고 볼 수 있는데, 아마 미츠하가 황혼의 시간을 알게 된 고전 수업에서 나왔던 선생님이 「언어의 정원」에서의 그 주인공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정원」에서 스토리의 주요한 힌트로 작용했던 만엽집万葉集의 이름이 그 때 칠판에도 적혀있고, 유키쨩 선생님ゆきちゃん先生이라고 불린 것에서 「언어의 정원」의 유키노雪野百香里 선생님이 전근 온 학교가 이토모리 마을이 아니냐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유키노 선생님인지에 대해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전 작품의 요소를 사용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는 만큼, 「언어의 정원」의 유키노 선생님이 영향을 받은 캐릭터인 점까지는 사실이 되겠네요. 참고로, 마지막 엔딩에서 드디어 재회한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를 찾기 위해 헤메던 그 거리는 「초속 5cm」에서 똑같이 로케이션으로 사용했던 그 곳입니다.
「언어의 정원」에서 모습을 비췄던 만엽집의 재등장
마지막으로, 미리 미래를 보게 된 미츠하의 주도로 발전소 폭파 사건을 일으킨 후 사야카의 방송을 중단시키고 내보냈던 '그대로 있으라'라는 방송이 모든 사건을 알고 있는 관객들, 특히나 한국의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트라우마와도 같이 작용했을 겁니다. 아직까지도 정치적인 진실 공방을 휩싸이며 지워지지 않는 상흔처럼 전국민을 괴롭히고 있는 세월호 사건을 연상하기 때문일 것인데, 이 멘트가 실제로 세월호 사건의 영향을 받은 장면이라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물론 해당 상황에선 행정적으론 원인 불명의 테러에 가까웠기에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이미 어떤 사건인지 다 알고 있는 입장에서 마을 하나가 통째로 날아갈 재앙이 예견되어 있음에도 '그대로 있으라'는 방송은 답답하기 그지 없었던 부분이었을 겁니다.
8. 리뷰를 닫는 이야기: 기쁘게 하기도 슬프게 하기도 하는 당신의 이름
"치열하게 기억하고 있어야할 '너의 이름'"
대부분은 잊어버리는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 당장은 내가 오늘 지하철에 몸 담고 있는 시간을 바쳐서 외운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이 싫을 것이며, 멀리는 몇 년 전 1분 1초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즐거운 여행의 기억을 이제는 여행 장소의 이름도 간당간당할 정도로 잊어버리는 것이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역설적으로, 이 사건만은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함께할 것입니다. 바로 「너의 이름은.」처럼, 소중한 한 사람을 불가항력적으로 잊어버리고, 그 사람의 빈 칸을 여과없이 느껴야하는 것과 같이 말이죠.
영화관에서 두 번이나 봤습니다만, 두 번 다 본격적으로 혜성 낙하 연출이 시작되면서부터 작품의 끝까지 저는 두 손을 꼭 모아 마치 기도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이 작품을 지켜봤습니다. 물론 첫번째와 두번째는 그 이유가 조금은 달랐을 것 같습니다. 둘 다 똑같이 그것은 기적의 염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 첫번째와 두번째 사이에는 분명히 그 간극이 존재했을 겁니다. 전국민적이며 타자로써의 염원과 그 당사자로써의 염원이라는 차이를 말이죠.
1월 13일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번 포스팅이 예고된 날이자, 유독 13일의 금요일이라는 서양의 불안한 미신이 신경쓰였던 그 날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집안은 한동안 비상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할머니를 계속 지켜보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 예견은 하고 있었지만, 예견이랑 당장 제가 눈물이 나는 건 별개의 일이더군요. 어쩌면 막을 수 없던 일이었지 모르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막을 수도 있었던 일이라 이것도 예견한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죠.
그래서인지 저는 소중한 사람을 잊어버린 사람을 위한 기적을 바라고, 그 기적의 선물로 이 작품을 건네주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직 BD도 안 나와서 스크린샷을 PV에서 제한적으로 가져올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그리고 장례의 뒷처리를 위해 예상 외로 많은 날을 날려먹고서도 작정하고 「너의 이름은.」을 선택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내멋대로'라는 이 포스팅의 이름에 걸맞게 말씀드리자면, 그 일이 있건 없건 저에겐 이 작품이 극장 개봉한 애니메이션 중 정말 잊지 못 할 최고의 작품이었어요. 물론 제가 포스팅을 쓸 정신으로 돌아오는 데는 정말 생각보다 오래 걸렸기 때문에, 결국에는 또 염치 불구하고 포스팅 연기 공지를 내버렸고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죄송한 일입니다. 아직 프로가 되기까지는 조금 더 힘을 써야할 모양입니다.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의 기억을, 그것이 평생동안 아픔을 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반으로 닦아 딛고 올라서야만 하며 치열하게 기억해내야만 하는 모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기적의 이야기가 그 사람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어루만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 하나의 진혼곡과도 같은 의미로 이번 [내멋대로 리뷰]의 포스팅을 닫겠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로 끝맺게 되어서 사과드려요!
아참, 그리고 예전에 호외편이라는 이름으로 잠깐 「너의 이름은.」에 대한 의견을 밝혔던 포스팅이 있습니다. 작품적인 내용보단 작품 외적인 것에 대한 코멘트가 있으니, 참고하고 싶으신 분들은 참고해주세요! 호외편은 텍스트 많이 없습니다.
저번에 업로드했던 긴급 호외편은 이미지를 클릭해주세요!
그리고 또 하나, 이 작품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내준 지인들에게, 특히 제 둘도 없는 동네 친구들과 못 말리는 미쿠 덕후(...) 동생과 언제건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떠들 수 있는 학교 동생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 분들이 없었으면 이 포스팅도 이만큼 이야기를 못 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 작품은 당장 자세하게 이미지를 촬영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BD 발매 타이밍에 맞춰 해당 리뷰 포스팅은 영상화 작업으로 다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그 때면 한국에서는 관심이 거의 다 식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자세한 이미지 없이 포스팅을 마무리하긴 많이 아까운 기분이 드네요. 첫 영상 리뷰는 추후에 만나뵙도록 하지요!
이번 포스팅이 밀리는 바람에 다음 포스팅은 또 2주가 채 안 남게 되었네요.
이제 정말 밀리면 안 되겠어요, 이러다가 취미로 하는 게 강행군이 되겠어 (...)
본래 생각해둔 게 있었지만, 오늘 엔딩이 엔딩인만큼 일부러라도 분위기는 살짝 바꾸겠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꿈과 희망의 공간의 충격적인 반전을 다룬 다음 손님을 기대해주세요!
다음 업로드 날짜는 2월 10일이니 다음 날인 11일부터는 열람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