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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재방영(상영)관

#5. 약하지만 강한, 강하지만 약한 인간을 향한 예찬 (애니메이션 <새벽의 연화>)




※ 이 포스트 및 영상은 애니메이션 <새벽의 연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여기 한 명의 공주가 있습니다. 빨간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이 공주의 이름은 연화.


하지만 연화 공주는 자신의 모든 것에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옆에는 맨날 놀리기나 하는 소꿉친구인 학이 경호원으로 있고, 눈에 확 띄기만 하고 만지기는 어려운 빨간 곱슬머리는 연화의 골칫거리였죠. 하지만 또 다른 소꿉친구인 수원만큼은 달랐습니다. 이따금씩 서투른 모습을 보이는 수원이었지만, 수원은 항상 연화의 편에 서 주었습니다. 연화는 그런 상냥한 수원이 좋았죠. 연화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려는 아버지이자 고화국의 왕인 일은 연화의 어머니가 음해 세력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연화에게도 각별한 수원을 연화의 남편이자 후대 왕으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와 상관없이 수원과 연화는 연화의 16번째 생일날 서로의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하게 되죠.



하지만 그 날 밤,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간 아버지의 침실에서 연화는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장면을 생생하게 지켜보고 맙니다. 그리고 아버지 일을 살해한 범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수원이었죠. 그리고 자신이 일을 살해하는 것을 본 연화를 향해서도 수원은 냉정하게 칼을 겨누죠.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미리 눈치챈 학이 아슬아슬하게 연화를 구해내지만, 연화도 학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달랑 목숨 하나만 부지한 채 그들의 성인 비류성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합니다.



더 이상 의지할 마음의 장소가 없어진 연화는 몸도 마음도 병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가는 거라 생각하던 학은 자신의 고향, 바람의 부족의 땅으로 연화를 안내합니다. 바람의 부족이 수원에게 암묵적으로 반기를 들자 바람의 부족 사람들이 크고 작은 고난을 겪는 중에도 서로가 남을 돕는데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연화는 이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안전히 보호받기를 원했던 학의 바람과는 달리, 학에게 자신을 동행시켜 달라고 부탁하죠.



연화는 바람의 부족의 땅을 나서자마자 자신의 무력함을 또 절감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빈틈을 보이면 학이 자신을 대신해 다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죠. 이 때부터 연화는 사람을 단번에 압도할 수 있는 강렬한 눈빛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고로 떨어진 곳에서 연화는 넘어져서 다치는 게 일상인 신관 익수와, 그런 익수의 옆에서 집안일이든 뭐든 척척 해내는 소년 윤과 만나게 됩니다. 지배층의 힘은 멀고 1시간이 남았는지 하루가 남았는지 모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저지르고 봐야하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났던 윤은 나라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연화에게 독설을 퍼붓죠. 그런데 익수는 연화와 학에게 4명의 용을 찾으라는 신의 뜻을 전하고,

윤을 그 여정에 동행시켜주기를 부탁합니다. 처음에 윤은 익수의 말에 버럭 화를 냈지만, 사실은 타인에게 간이며 쓸개며 다 내주는 착한 익수를

보살펴주고 싶다는 윤의 표현이라는 것을 보며, 연화는 윤의 똑 부러지는 겉모습 뒤에 상냥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3명으로 시작한 여정은 백룡을 시작으로, 청룡, 녹룡, 그리고 황룡까지 만나며 7명의 여정이 되죠.



이들에게는 모두 힘이 있었습니다. 학은 칼의 움직임이 번개와 같아서 '뇌수'란 별명이 붙은 장군이고, 윤은 생존 지식이 많고 솜씨가 좋은 똑똑한 소년. 백룡 기자는 어마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오른팔의 소유자. 청룡 신아는 멀리 볼 수 있는 눈과 절도 있는 검술을 겸비한 무사. 녹룡 재하는 멀리 뛸 수 있는 발로 여기저기를 누비는 방랑자. 그리고 황룡 제노는 제대로 검증된 바는 없지만 탈이 나지 않는 튼튼한 몸의 소유자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겉보기의 힘만 보면, 각자의 힘으로 무장한 6명이 변변찮은 능력 하나 없는 연화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 힘 없는 소녀를 반드시 앞에 세웁니다. 이 구조 안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 6명은 힘 없는 연화의 앞에서만큼은 쉽사리 약점을 보여주는 약한 사람들로 관계가 역전됩니다. 특히 괴력의 오른팔을 갖고 있지만 세상 물정에 대해선 연화만큼도 모르고 있는 백룡 기자와, 어디든 도약할 수 있는 다리가 있지만 자기가 마음을 줄 공간 하나, 사람 한 명이 없어 방황하는 녹룡 재하는 이 모순을 크게 느끼는 캐릭터죠.



똑 부러지는 윤도 자신이 정을 준 사람을 위해선 바보가 되어버리는 다정한 소년. 자신의 힘을 저주로 알고 사람을 피하던 청룡 신아는 연화 덕분에 마음을 열고, 황룡 제노는 연화 앞에 등장할 때부터 빈틈 가득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연화의 한 마디로 기꺼이 연화의 편에 서기로 결정하죠.


이 중에서도 학은 연화 앞에서 연정이라는 제일 큰 약점을 드러내는 캐릭터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제멋대로여도 자신이 해야할 말에 망설임이 없는 연화에게 학은 이미 정체모를 흔들림을 느끼고 있었지만, 연화는 수원에게 일편단심이었기 때문에 학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억누르며 연화를 지켜보고 있었죠. 하지만 연화의 성장은 학이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서투르고 힘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연화는 학을 구하겠다고 칼을 빼들었고, 학의 뒤에만 숨을 수 없다는 사명감 하나로 연화는 밤낮없이 궁술을 익혀 결국 인신매매를 일삼던 악덕 관리, 양금지를 자신의 활로 처단합니다. 그저 제멋대로이면서도 당당한 사람인 줄만 알았던 한 명의 소녀가 사명을 지닌 한 나라의 지도자 같은 마음을 지니는 과정을 지켜보며 학은 점점 자신을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하죠.



그렇습니다. 연화는 겉보기에 강한 힘이 아닌 마음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생명을 다치게 하는 게 싫음에도 무기를 잡고, 공포에 눈물이 나고 다리가 떨려도 절벽 위를 걷고. 힘으로 사람의 위를 차지해 명령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힘, 혹은 그 이하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연화만의 힘. 그 다정함이 연화를 한 명의 지도자의 모습으로 이끌죠.



한 편, 일을 살해하고 왕좌를 차지한 수원은 싸움이라면 무조건 피하려고만 했던 일이 되려 고화국을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나라를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연화나 학 앞에서 보여줬던 상냥한 모습 또한 여전히 수원의 모습이었죠. 힘이 자신보다 강하지 않으면 왕으로써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땅의 부족의 장군 근태는 실실 미소짓기만 수원을 처음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놀이에서 힘이 아닌 전략으로 자신을 밀어부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족의 새로운 수입원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며 근태는 수원을 다시 보게 되죠.



그러다가 악덕 관리인 양금지를 조사하겠다는 목적으로 행차한 아와에서 수원은 연화와 갑작스레 재회합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과 왕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의 만남. 하지만 수원도 연화도 서로를 죽이지 못 합니다.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수원과 내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연화는 고화국을 위해서라는 같은 곳을 바라봄에도 절대로 같이 할 수는 없는 관계가 된 것이죠. 이 나라의 답은 과연 누구에게서 나올지. 약하고도 강한 연화와 수원의 모습을 지켜보시길 바랍니다.


일은 수원이 봤던 것처럼 유약한 척 싸움을 피하기만 하는 겁쟁이였는지.

아니면 학이 봤던 것처럼 싸움은 싫어했지만 절대로 약하지는 않았던 왕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백성들은 언제나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던 것인지.

그리고 신의 힘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신의 힘이라는 건 정말로 유효한 것인지,

그리고 사람은 모순되기에 추한지 아름다운지.


이 작품이 사람을 향해 어떤 입체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를 지켜보시길 바랍니다.



약하지만 강한, 강하지만 약한.

미완성이라서 오히려 완성되는 사람들이 한 나라의 새벽을 여는 이야기.


<새벽의 연화>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