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포스트는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며,
동시에 이 작품의 원작 만화 [목소리의 형태]의 스포일러도 겸합니다. ※
! 중요한 이야기 !
이번 [목소리의 형태] 이야기를 하는 포스트 도중,
가끔씩 여러분들의 도덕적인 직관으로 뭔가 이상하다 싶은 발언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목적은 이 작품이 정말 말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본질에 제 나름대로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보기 위해서일 뿐,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도덕적으로 불편한 요소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목소리의 형태] 포스트의 시작마다 항상 안내됩니다.
저는 이 작품을 희망적인 작품이라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분명히 이 작품은 불편한 구석이 있는 작품입니다. 장애인을 향한 집단 괴롭힘이라는 소재는 이래저래 민감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는 문제고, 이 왕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성장한 뒤 다시 만나서 순정 만화 비스무리한 느낌을 풍기는 고백 장면을 만들어내는 건 이 작품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장면이죠. 하지만 이 작품을 디스커뮤니케이션으로 설명해내면, 이 작품의 모든 캐릭터들은 소통의 어려움을 절감하면서도 동시에 알게 모르게 타인과 잘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 됩니다. 즉, 모든 사람들은 디스커뮤니케이션을 경험하지만 그 디스커뮤니케이션을 넘어 타인과 소통하고 연결되며 지내죠. 어두운 상황에서도 한 줄기 빛이 있다는 가능성. 이것이 이 작품, <목소리의 형태>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 이 작품의 화면 연출과 이명 소리입니다.
먼저 화면 연출을 살펴보죠. 이 작품에서 막상 어두컴컴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화면이 있었냐고 한다면 막상 잘 떠오르는 장면이 없습니다. 어두운 시간대여도,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이걸 보여주는 화면이 어두컴컴하고 침울하게 느껴진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 작품이 밝거나 어둡거나 하는 하나의 분위기에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화면을 구성하는 데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특히 쇼코의 핑크 눈물은 이런 의도를 위한 화면 연출 중 제일 실험적인 시도죠.
쇼코의 눈물이 핑크색!
자극적인 장면을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쇼코가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은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고, 여기에 신나는 합창곡 반주를 배경음이 깔리면서 비극적인 분위기에 치우치지 않는 느낌을 주죠. 특히 쇼코가 자살하기 직전의 묘사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님의 주특기인 부분 묘사가 유감없이 발휘되서, 온갖 상징과 암시를 동원해 간접적으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쇼코가 무엇을 하려는지 전달하는 데는 전혀 애로사항이 없고,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묘사를 회피함과 동시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효과까지 챙긴, 이 작품의 명장면이죠.
다음은 이 작품의 중요한 컨셉인 이명 소리입니다. 이명은 의학적으로 외부의 청각적 자극이 없는데도 자신이 들리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 벌어지는 디스커뮤니케이션의 원인이 타인의 말을 내 생각에 맞춰 듣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만이 들리는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어드는 이명 소리는 디스커뮤니케이션의 상징과도 같이 보이죠.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이명 소리는 쇼야가 타인의 이어지고 싶다는 마음을 받아들이며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있다는 의미인, X 표시가 떨어지는 순간에 들어갑니다. 이명 소리를 쇼야가 타인의 말을 잘못 듣고 있는 때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마음을 잘 받아들일 때 쓰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이명이 일어나는 지금 당장의 굴절 현상보다는 이명이 발생한 이후 새롭게 다시 들리는 가능성과 희망에 주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 제일 이명 소리가 심하게 깔리는 쇼코의 바람과 불안감이 만든 환상 이후, 쇼야와 쇼코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다리 위에서 만나 대화하는 모습은 이 생각을 뒷받침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죠.
한 쪽 분위기에 치우지지 않은 화면 연출과 이명 소리 이후의 새로 들림에 주목하는 이명 소리란 컨셉의 사용. 이 두 요소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그 상황의 뒷면에 있었던 희망의 가능성에 주목하려는 이 작품의 테마를 향합니다. 어둡지만 어둡게 느껴지지 않고, 밝은 배경 위에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역설적인 화면 연출은 "이들을 둘러싼 세상만큼은 변함없이 아름다웠으면 했다"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님의 생각이 담긴 연출이죠. 캐릭터를 연기하는 성우들에게 "캐릭터의 목소리를 어둡게만 연기하지 말아주세요"라는 주문도 캐릭터의 뒷면에, 사실 늘 있었던 희망의 가능성을 주목해달라는 의도와 맥을 같이 하죠.
둘은 싸움을 하고 있지만, 둘을 비추는 노을빛은 아름답게 그려진다.
이 작품이 왜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작품이 누구에게나 있는 디스커뮤니케이션을 다루지만, 이 디스커뮤니케이션을 이 작품은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로만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과 이어지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뤄지는 일이기에, 디스커뮤니케이션은 어쩌면 딱 종이 한 장 차이로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거죠. 즉, 말하는 방식 한 번, 생각하는 방법 한 번과 같은 점 하나 바꾸는 일이 해결책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이 작품이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왜 쇼야가 자살을 시도했던 시점이 이야기의 시작이 되느냐면, 쇼야가 이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쇼코와 만남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시작된 만남에 어설프고 치명적인 실수도 많았지만, 그 과정들을 지나 진심으로 사과하고 또 통할 수 있었던 쇼코와 쇼야. 이 결과는 결국 시작해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시작을 만들어낸 상황이었던 쇼야의 자살 시도를 'a point of the light'라는 문구와 함께 이야기의 시작으로 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제 <목소리의 형태> 이야기는 마지막 한 포스트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트는 흐름상 다루지 못 했던 단편적인 조각들을 다루고,
에필로그와 함께 <목소리의 형태> 이야기를 마무리 해보겠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다시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