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포스팅은 TV 애니메이션 《울려라! 유포니엄》의 스토리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처음에도 이 작품을 ‘군상극’이라고 소개드렸듯, 이 작품은 한 집단 속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이 충돌하며 갈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많은 캐릭터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작년의 사건’ 또한 그 갈등 중에 하나죠. ‘작년의 사건’은 누가 봐도 작년 3학년 선배들의 잘못인데 뭔 정의를 따지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저도 물론 ‘작년의 사건’은 전적으로 3학년 선배들의 책임이라 생각하지만,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이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까지 생각해보는 건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은 이 갈등에 얽힌 당사자들이 각각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에 앞서, 우리는 ‘작년의 사건’을 오직 후배들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작년 3학년 선배와 비슷한 입장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년의 사건’과 갈등 구조가 비슷한 쿠미코의 과거 에피소드를 먼저 언급해보려고 합니다.
“너만 없었으면, 콩쿠르에 나갈 수 있었는데!”
이 갈등의 핵심은 시간의 정의, 즉 선배를 우선시하는 가치와 실력의 정의, 즉 실력을 우선시하는 가치의 충돌입니다. 이 두 가치가 충돌하는 일은 사실 웬만하면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특히 선천적인 능력을 타고나야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이룰 수 있는 능력인 경우라면 실력은 경력에 비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전체의 일부. 후배가 선배보다 실력이 월등한 경우 또한 결코 드문 일이 아니죠.
그러면 후배보다 실력이 뒤쳐진 선배 쪽에서 왜 이런 폭력적인 발언이 나오는 걸까요?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시간이 한정된 학교라는 집단의 특수성을 원인으로 지목해볼 수 있습니다. 내 희망과는 관계 없이 이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심리는 압박감으로 다가오기 좋죠. 그래서 실력이라는 냉정한 부분에선 도저히 정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 제약이 있는 학교에서의 마지막 기회까지 뺏긴 선배는 자존심이나 태도와 같은 사실상 떼쓰기에 가까운 비이성적인 반응이 나오게 된 겁니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 ‘작년의 사건’ 이야기로 돌아오죠. 그러면 선배 쪽이 내세우는 정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선배를 존중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제까지의 관현악부는 실력에 관계 없이 선배를 우선시해왔구요. 이런 정의가 세워진 집단 안에서라면, 선배의 입장에선 자신에서 따지러 오는 후배는 관현악부 전체에 도전하러 오는 사람으로 보이게 되겠죠. 물론 선배들 중에는 후배였을 때는 억눌렸으니까 지금은 좀 내맘대로 정해도 되지 않느냐고 생각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배의 입장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건, 관현악부로써 악기를 연주해보자는 의견이 거절할 거리가 못 된다는 것과 대화를 받아주는 태도가 완전히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던 ‘작년의 사건’은 타키 선생님의 지도 하에 조금씩 극복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오디션이 시작되고, 어김없이 후배가 선배를 제치는 사건이 발생하며 ‘작년의 사건’과 비슷한 모습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갈등은 레이나와 유우코 사이에서 터져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동경하는 선배인 카오리가 올해는 솔로에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유우코가 레이나와 타키 선생님이 아는 사이라는 약점을 빌미로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따낸 것이라 단호하게 말하는 레이나에게 폭발해버린 것이죠. 레이나와 적대 관계라는 것도 그렇고 작품 안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인상깊게 남았기 때문에, 그래서 유우코를 부정적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았을 겁니다. 특히 카오리를 위해 갈등을 일으킨 것이 결국 카오리를 더욱 더 피해자로 만들 수 있음을 고려하지 못 한 건 유우코의 한계점이죠.
하지만 이런 겉모습에서 한발짝 떨어져 생각하면, 유우코는 ‘타인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캐릭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력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유우코의 발언이나 반응 등 여기저기서 유우코가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죠. 그래서인지 유우코는 자신이 정을 준 사람에게는 쉽게 휩쓸려버리는 캐릭터입니다. 유우코가 동경하는 선배를 위해 자기가 악역이 되기를 자처할 만큼 카오리를 위해 했던 모든 행동은 웬만한 공감하는 능력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모습이죠.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사이인 나츠키와의 모습도 잘 보면 냉철한 나츠키의 반박할 수 없는 조언에 알고 있지만 거절하고 싶다는 감정적인 반응을 하는 정도라 나츠키한테 일방적으로 당하는 관계죠. 악역으로 보일 여지가 많았지만, 또 이런 사람들이 ‘내 사람’이라 생각하면 또 누구보다 잘 해주는 타입이라는 거죠.
다행히도 이 사건은 카오리와 카오리의 과거 때문에 벌어진 일로, 근본적으론 카오리가 자신의 마음을 잘 정리해준다면 정리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침 시기 적절하게 타키 선생님이 공개 오디션이란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들고 오면서, 카오리와 레이나는 직접 서로의 소리를 들을 기회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레이나가 자신보다 뛰어남을 알고 있었고 다만 자기 자신에게 납득하고 싶었던 카오리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사건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세상엔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수만큼의 생각이 있다고 하죠.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만큼, 이 사람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것 그 자체는 사실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 갈등 자체보단, 그 갈등이 왜 일어나서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겁니다. 이제까지 제가 캐릭터를 하나하나 뜯어서 이야기해본 건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고 따라서 이 부분은 인정할 수 있지만 저 부분은 다시 생각해봐야한다고 말하는 군상극으로써 이 작품을 한 번쯤 봐주시길 바라서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주인공 쿠미코의 차례입니다.
다음은 주인공 쿠미코를 데리고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