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포스팅은 TV 애니메이션 「빙과」의 스포일러 요소를 포함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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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다운 행동을 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키타니 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호타로는 ‘금기어’라는 심상치 않은 단어를 마주합니다. 카미야마 고등학교의 문화제를 줄여 말하는 단어라고 주어진 ‘칸야제’가 ‘금기어’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세키타니 쥰이 영웅적인 행동으로 지켜낸 것이 바로 카미야마 고등학교의 문화제 ‘칸야제’였기 때문이었죠.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챈 호타로는 세키타니 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추리를 시작합니다.
‘금기어’라는 정보를 통해, <빙과>의 서문에 적혀진 글이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라 객관적인 내용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에루가 호타로를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조력자로 확신했던 의문의 책 대출 사건을 해결한 곳이자 고전부의 문집을 찾기 위해 갔었던 도서관에서 사서였던 선생님 ‘이토이가와 요코’의 반응을 기억해내며 세키타니 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더 가까이 접근하는데 성공합니다. 일본에서는 결혼한 뒤 여성의 성이 남성의 성을 따라가므로, 나이대를 고려했을 때 45년 전 서문을 썼던 ‘코리야마 요코’와 동일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고, 고전부 4인방의 앞에서 요코 선생님은 자신이 그 서문을 쓴 사람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죠. 그리고 호타로는 제일 의문을 품고 있었던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세키타니 쥰은 원해서 모든 학생의 방패가 된 건가요?
이것이 바로 ‘금기어’라는 단어에서 호타로가 읽어낸 위화감의 정체였습니다. 요코 선생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였습니다. 요코 선생님의 증언을 통해, 세키타니 쥰은 문화제 축소를 반대하는 모임의 대표를 떠밀려서 맡았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 집회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던 도중 무도회장이 화재로 반파되는 큰 사건이 일어나자 명목상의 리더였던 세키타니 쥰이 본보기로 퇴학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이 사실을 들은 고전부원들은 자신이 신경쓰고 있었던 몇 가지 부분에 대해 답을 얻기 시작합니다. 먼저 마야카는 상당히 신경 쓰였던 문집 <빙과>의 표지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마야카는 토끼를 물고 있는 개가 학교, 개에게 물린 토끼가 세키타니 쥰, 그리고 개에게 물린 토끼를 방관하고 있는 토끼들이 학생이라는 의미를 도출해냅니다. 호타로는 1화에서 에루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무도관이 다른 학교 건물에 비해 유독 낡아 보이는 것이 당시 무도관이 불탔던 일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죠.
사토시는 ‘칸야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칸야제’가 세키타니 쥰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결론을 도출합니다. ‘칸야제’에 대한 정확한 한자가 알려져 있지 않았던 탓에 단순히 ‘카미야마’라는 학교의 이름을 줄여 말하는 것이 ‘칸야’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세키타니 쥰의 성 ‘세키타니’에 쓰인 한자의 다른 읽기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일본의 한자 읽기가 음으로 읽는 음독(水를 ‘수’로 읽는 것과 같음)과 뜻으로 읽는 훈독(水를 ‘물’로 읽는 것과 같음)이 있어 한 한자에 기본적으로 2개 이상의 발음이 나올 수 있는 것을 활용한 다른 읽기 방식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세키타니 쥰이 원해서 대표가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전부에서는 ‘칸야제’라는 단어가 ‘금지어’로 설정된 것이었죠.
마지막으로 남았던 의문은 이 문집의 제목이 왜 ‘빙과’였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키타니 쥰에게 어떻게 해서든 ‘빙과’가 문집의 제목이 되어야한다고 직접 들었던 요코 선생님마저도 이 질문에 대답을 내지 못 하죠. 그런데 호타로가 ‘빙과’라는 제목을 지은 것은 시시한 말장난이었다고 말하고, ‘빙과’라는 단어의 영어 단어인 ‘아이스크림(Ice cream)’를 사용한 말장난이었다고 말하며 이것이 세키타니 쥰이 에루에게, 그리고 고전부의 후배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소리친다, 인가…
에루는 드디어 기억해냅니다. 이 문집의 이름은 왜 ‘빙과’고 이런 그림이 왜 표지가 되었냐는 어린 에루의 질문에, 에루의 외숙부 세키타니 쥰은 ‘강해지지 않으면 소리도 지르지 못 하고 산 채로 죽어버릴 것이다’라는 대답을 했다는 것을 말이죠. 어린 아이에게 해준 대답이라고 하기엔 ‘소리도 못 지르고 산 채로 죽을 것이다’는 말은 상당히 살벌하고도 가혹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가뜩이나 화도 잘 못 내는 여린 성격의 에루가 감당하기에는 무서운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키타니 쥰이 에루에게 전해준, 그리고 고전부원들에게 전해준, 인생에 대한 조언이 되었을 것입니다.
에루의 부탁을 완료한 시점. 에루는 사토시와 마야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 기억을 되찾는 것을 완수하지 않은 채 10년 후 잊어버리는 것을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은 “지금”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 말을 생각하며 호타로 또한 누나 토모에에게 보내는 편지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기 시작합니다. 편지를 정리하던 호타로는 마치 이 모든 상황을 당연히 겪을 것이라 예상했다는 듯이 누나가 자신을 고전부로 등을 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가 그럴 리가 없다며 곧바로 단념하죠. 하지만 이제까지 호타로의 누나 토모에가 작품에서 행하는 역할이나 위치를 봤을 때, 호타로가 이렇게 동요할 것이라는 것까지 전부 다 토모에가 호타로를 위해 짠 큰 그림일 지도 모른다는 호타로의 의심은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토모에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 본격적으로 모습을 비추는 <쿠드랴프카의 차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호타로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죠.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길게 풀었는데, 호타로가 ‘세키타니 쥰의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어떤 심리의 변화를 겪었느냐를 생각해보면 결론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타로는 “에너지 절약”이라는 “잿빛”의 좌우명을 자신의 굳은 신념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호타로와 친구 사이였던 사토시도, 고전부 문집을 위해 찾았던 도서실에서 재회한 악연(?) 마야카도, 그리고 누나의 부탁으로 들어간 고전부에서 처음 만난 에루도. 학생회의 총무위원이라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고, 도서위원이라는 강요되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하고, 외숙부와의 기억을 찾는다는 ‘꼭 필요한 일’ 이외에 힘을 쓰는 것을, 호타로 자신을 제외한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전부 다 하고 있는 것에 호타로는 불안감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사토시나 마야카는 호타로의 옆에 있었음에도 호타로의 불안감을 자극하지는 않았는데, 호타로에게 찾아왔던 새로운 자극은 바로 에루였습니다. 에루는 호타로의 말에 따르면 에너지 효율이 심각하게 나쁜 인물이었고, 예전에도 언급했듯 호타로와 에루는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죠. 호타로가 자신과 완벽히 반대편에 있는 에루의 행동에 되려 자신을 움직이자고 마음을 먹은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해야할 것들을 하면서도 나머지 에너지를 외숙부의 기억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진심 담긴 모습 때문이라는 것도 언급한 적이 있었구요.
호타로가 적극적으로 세키타니 쥰의 과거를 찾는 일에 조력하게 된 계기
과거를 파헤치려고 온 에너지를 던지는 에루. 문화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학교 생활을 희생한 세키타니 쥰.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듯 에너지를 쓰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호타로는 에루로 대표되는 “장밋빛” 생활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의문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하면, “장밋빛”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잿빛”인 자신은 얻지 못 할 것에서 기인하는 불안감이라고 할 수 있죠. 이것이 바로 호타로가 사토시에게 고백했던 불안감의 근원이었고, 사토시에게 “장밋빛”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넌지시 한 번 비췄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불안이 호타로에게 찾아온 자신의 “잿빛” 정체성에 대한 동요라고 말할 수 있죠. 이제 호타로에게 세키타니 쥰의 과거를 밝혀내는 일은 단순히 에루의 부탁이란 수준을 넘어, 자신의 인생관에 대한 고민의 답이 되어줄 수도 있을 중요한 사건으로 의미를 달리 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생활이라고 하면 “장밋빛”이라고.
하지만 그런 고등학교 생활을 도중에 중단하게 될 정도의 강렬한 “장밋빛”은
그것도 “장밋빛”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잿빛” 생활과 “장밋빛” 생활에 대해, 자신이 유지하고 있던 “잿빛”의 생활이 견고하게 유지되지 못 하고 동요하고 있던 시점. 누나의 전화에서 세키타니 쥰의 사건은 비극이었다는 단서가 등장함에 따라, 호타로의 고민은 또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새로운 국면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위에서 인용한 호타로의 독백이죠. 이 독백에서, 이제까지 고집하던 “잿빛”에서 벗어나 “장밋빛”으로 향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던 호타로가 “장밋빛” 생활에서도 치명적인 부분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밋빛”에도 치명적인 부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 정체성의 정립에 중요한 시선인 이유는 바로 “장밋빛”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잿빛”과 같이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의 선택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장밋빛”이나 “잿빛”이나 똑같이 얻는 게 있고 또 잃는 게 있는 동등한 자격으로 존재하는 삶의 방식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호타로의 고민이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더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골라보는 선택의 작업 중에 생기는, 어쩌면 청소년기에 자연스러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인 셈이죠.
세키타니 쥰의 사건을 해결한 이후로 호타로가 자신의 신념에 크게 동요하는 일은 이제 거의 없어집니다. 이 이후로 호타로의 신념은 “에너지 절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호타로가 “에너지 절약”의 “잿빛” 생활을 선택하는 것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막상 보면 사건이 있기 전과 후의 결론은 결국 “잿빛”의 관철로 변함이 없어 보이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 둘의 결론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하죠. 정체성은 사람들과 같이 하는 사회에서 살아 나갈 때 어떤 것을 옳다고 판단하고 그르다고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행동 강령이자 도덕 관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정체성이 사회가 보는 관점에서 올바르게 형성되었을 경우, 확고한 정체성은 자신이 정한 정체성으로 인해 잃는 것들에 대한 충격을 완화시키는 자아의 무기이자 방패로 기능할 수 있게 되죠.
세키타니 쥰이 ‘강해지지 않으면 산 채로 죽는다’라고 말한 조언도 이런 확고한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것과 관련 있는 조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세키타니 쥰이 나는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는 운동에 떠밀리지 않겠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어서 조금 더 강경하게 어필할 수 있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죠. 물론 세키타니 쥰이 겪었던 문제는 본인이 정체성이 확고한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을 심도 있게 파고 들어가면 권력의 불균형에 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중심이 되었던 호타로의 심리와 이 조언을 엮어본다면,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 또한 사회에서 ‘강해지는’ 것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죠.
호타로가 사건의 전후로 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정체성을 자신이 확고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호타로가 누나 토모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호타로는, 고전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자신의 스타일을 되돌아보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호타로의 신념은 사건의 전에도 확실히 “잿빛”의 활동 양식이었지만, 그 양식에 완전히 정반대의 “장밋빛”에 있는 에루를 보며 “잿빛”이 ‘틀리고’ “장밋빛”이 ‘옳은가’라며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정체성이 도전을 받아 흔들리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키타니 쥰의 사건이 비극이라는 것을 마주하면서 호타로는 “장밋빛”과 “잿빛”이 동일한 자격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선택이나 얻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이 과정을 통해 하나가 무조건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개인적인 시선에서 무엇이 맞는가를 고민해 선택하는 문제임을 알았을 때, 자신의 정체성은 열등감으로 위협받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결론적으로 확고해진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빙과>를 호타로가 청소년기에 겪을 수 있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키워드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대해 이 작품에서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장밋빛”과 “잿빛”이라는 색채였구요.
내가 너를 무시하려고 했다면, 나는 너를 ‘무색’이라고 불렀을 거야.
정체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색”과 “잿빛”은 확고한 정체성이 있냐 없냐의 문제로,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내실은 다른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빙과> 편의 리뷰 포스팅을 마무리합니다. 정리와 함께 약간 분량이 길어졌지만, 읽어주시는 분들도 같이 생각해주시고 의견을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빙과> 편에 대해서, 이번 포스팅에 못 담은 이야기가 있는데 주제의 흐름과 연결성이 떨어져 이번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추가적인 정리 포스팅으로 또 언급을 드리겠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애니메이션 기준 8화에서 11화까지의 내용과 대응하는 <바보의 엔딩 크레디트> 편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어쩌면 제일 추리 소설에 가까운 사건이 벌어지는 편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럼 다음, 「빙과」의 4번째 포스팅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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