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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멋대로 리뷰

[내멋대로 리뷰/No.7] TVA "나만이 없는 거리" 리뷰

안녕하세요! 3월의 힘찬 시작...은 개뿔...

일주일만 시간이 멈춰주면 좋겠다고 생각 중인 스카이포스터입니다.


오늘은 저번에도 예고드렸듯, 처음으로 요청 받아 작성한 포스팅입니다. 요청이라고 해도 뭐 공식적으로 광고가 들어왔다거나 다른 분한테 포스팅 올려 달라고 연락이 왔다던가 하는 그런 건 아니구요. 개인적으로 친구가 같이 이야기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걸 포스팅이란 형태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결정한 포스팅입니다. 제가 어떤 작품을 처음 볼 때부터 이 작품의 포스팅을 작성해야지, 라는 마음을 먹고서 시작하는 걸 되도록 피하려는 편입니다. ‘평가하려는 자세’를 한번 취하기 시작하면, 작품 안에 녹아들지 못 하고 겉돌아서 외부적인 연출력 등에 대해서만 신경이 곤두서서 공격적으로 보게 되고 정작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를 놓치게 될까봐 취하고 있는 자세인데요. 그래서 한번은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보기만 하고서 두번째 볼 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재를 찾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번은 이번 포스팅을 위해 처음 접했던 작품고, 특별한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서 소재 거리는 보면서 찾아내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최대한 지양하려고 하는 ‘평가만을 위한 강박적인 작품 보기’라는 자세를 취하지 않고서도 이야깃거리를 충분히 낼 수 있는 작품이어서 다행이었어요.


아무튼 저에게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간단한 한줄 요약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봤구요. 곧장 오늘 [내멋대로 리뷰]의 7번째 손님을 소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감췄다고 감춰봤는데 저번 포스팅에서 올려드린 이번 포스팅의 실루엣 이미지는 금방 눈치채실 수 있었을 겁니다. 워낙에 유명한 키 비주얼Key Visual이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엔 부적합한 이미지이긴 했는데, 공식적으로 나온 상징성 있는 이미지가 생각보다 많이 없더군요. 그럼에도 "이 만화가 대단해!" 등의 객관적인 수치부터 주관적인 평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측면에서 최근 트렌드인 ‘미려한 그림체로 그려진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상업적인 요소가 상당히 배제되었음에도 크게 지지를 얻은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론 실루엣 이미지 만드는 보람이 제일 안 나는 작품이었달까요 ㅋㅋㅋ


오늘 [내멋대로 리뷰]


산베 케이三部けい 씨의,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진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A-1 Pictures 제작 노이타미나ノイタミナ 라인의

‘일단은 스릴러 장르’로 구분하는 애니메이션


「나만이 없는 거리僕だけがいない街」입니다.



※ 이 포스팅은 TV 애니메이션 「나만이 없는 거리」의 중요한 스포일러 요소를 포함합니다. ※


1) 「나만이 없는 거리」, 그리고 노이타미나


시작부터 제가 힘 줘서 일단은 스릴러 장르로 구분하는 작품이라고 말씀드렸죠. 뉘앙스에서부터 얼추 눈치채셨을 테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스릴러의 구성을 따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단은 이른바 스릴러라고 말하는 장르의 문법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살인 사건, 그 살인 사건을 저지르는 보이지 않는 범인, 그 범인을 추적하며 생기는 긴장감, 더 나아가 범인이 밝혀지는 것이 이 장르의 결말이라고 했을 때 결말의 반전까지. 스릴러의 정석을 충실하게 따라가며 스릴러만이 보여주는 잠깐의 장면도 방심할 수 없는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죠.


이렇게 스릴러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는 있으나, 몇 가지 요소가 단순히 이 작품을 스릴러라고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없게 만듭니다. 하나는 현재형의 사건을 추적하는 다른 스릴러와는 다르게 주인공의 ‘리바이벌Revival’, 이른바 ‘재상영’이라고 하는 일종의 시간 돌리기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예방하려는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애니메이션만을 기준으로 했을 때, 유독 이야기 흐름상 크게 조명될 캐릭터가 아닌 것 같은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자세히 조명하며, 오프닝 테마 영상을 비롯한 연출적인 측면에서 범인에 대한 정보를 많이 주고 있습니다. 작품을 보는 스타일에 따라 개인차가 있는 부분이고, 저는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요소를 통해 정통 스릴러에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 있는 요소를 조금 줄여낸 그 자리에 아동 폭력과 같은 사회적인 이야기를 채워넣으며 사회적으로 크게 시사하는 바를 남기고 있죠. 이렇게 크게 세가지 이유로 이 작품은 스릴러인듯 스릴러가 아닌 듯한 복합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스릴러의 연출 기법적인 측면을 차용해 긴장감 있는 분위기로 보는 재미를 추구함과 동시에 무거운 주제를 남긴 성장 스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 사토루藤沼悟는 물론이고, 사토루와 같이 성장한 사토루의 친구부터 심지어는 카요雛月加代가 연루되었던 연속 유괴 살인 사건의 빌미를 제공하거나 혹은 그에 관련된 어른들까지, 사토루의 행동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성장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금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스릴러라는 장르의 오락성과 성장극이라는 주제에서부터 나오는 작품성을 균형있게 겸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후반부에 진범에 대한 심리 묘사가 조금 부족했던 감은 있으나, 전체적인 스토리의 흐름에 크게 방해가 수준이 아닌 일종의 설정 공백 정도로만 생각해도 될만큼 크게 작용하는 부분이라고 하긴 힘들 것 같구요. 노이타미나 라인의 타입인 작품 답게 한 번쭘 진지하게 파고들만한 연출이나 주제성을 강조하며 소위 말하는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특히 주인공 사토루의 복잡하게 꼬인 기억을 하나의 영화 필름으로 묘사하면서 여러 복잡하게 얽힌 기억 중에 하나를 끄집어낸다던가 하는 등의 연출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회상은 필름 효과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필름 효과를 빼는 연출을 적용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복잡하지 않도록 하는 도우미의 역할도 수행하며 연출 방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작품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죠.



이 작품, 「나만이 없는 거리」는 물론이고, 2014년 3분기 작품인 「잔향의 테러残響のテロル」 등, 최근 주류가 되는 캐릭터 중심의 트렌드를 최소화하고 민감하고도 무거운 주제를 중심으로 담아내는 것은 몇몇 예외 작품을 제외하고는 노이타미나 라인의 독보적인 강점입니다. 특히 2016년 4분기 작품인 「배를 엮다舟を編む」는 언급한 노이타미나 라인 작품의 독특한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또 전통적으로 한 분기 방영 편 수가 일반적으로 12편에서 13편으로 편성되는 반면 노이타미나 라인 작품은 11편 정도로 적게 편성되면서 그 줄어든 분량에 대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잔향의 테러」 같은 경우는 도망치는 자와 잡으려는 자 사이의 상황 설계, 이른바 머리 싸움으로 작품 전체를 긴장감 있게 끌고 가던 것과는 달리 마무리는 모호하다든지 이해하기 어렵다든지 뜬금없다든지 하는 다양한 비판을 받은 이력이 있죠. 「나만이 없는 거리」는 다행히 1편을 더 받아서 12편이라는 보편적인 분량으로 진행되었으나, 어렸을 적으로 ‘리바이벌’해 과거의 사건을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주인공 사토루가 고군분투하던 때와 15년 간의 잠에서 깨어나 시작된 범인과의 2차전 사이의 긴장감의 온도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에서 진범에 대한 심리 묘사가 부족했다는 이야기를 힘 줘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약간 모자란 심리 묘사가 진범이 자신을 추적해내고 말았던 사토루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 등을 직관적으로 설명할 시간을 주지 못 한 채 결론을 내버린 감이 좀 있는 편이죠. 물론 그 짧은 편 수 안에 완급 조절이 훌륭했다는 평가가 중론이지만, 분량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난이도가 높았던 결말 연출이었죠.


아쉽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외에는 크게 흠 잡을 곳이 없는 작품입니다. 사토루가 과거를 바꾸고 15년간의 잠에서 깨어난 시점을 중심으로 그 전을 전반부, 그 후를 후반부라고 했을 때 후반부가 전반부에 비교해 아쉬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만큼 전반부의 흐름이 상당히 몰입도 있게 진행되었다는 의미있기도 합니다. 모자라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결말도 이제까지 이야기를 진행했던 흐름에 맞춘 ‘혼자에서 시작해 모두와 같이 하는 영웅’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노이타미나 라인이라는 작품의 평균과 다르게 편성 수를 한 편 더 할당한 것도 약간 비약을 보태서 이 작품에 정성을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구요. Asian Kung-Fu Generation이 인터뷰에서 「나만의 없는 거리」의 팬이라고 밝힌 것에서 거의 「나만이 없는 거리」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진 곡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 오프닝 테마 “Re:Re:”를 비롯해, 연출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인상깊은 OST들 또한 이 작품의 몇몇 공백을 채워줌과 동시에 이 작품에 공을 들인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유명한 것은 오프닝 테마지만, 개인적으론 결말 연출을 잘 보조해줬던 엔딩 테마가 더 인상 깊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2) 아동 폭력과 가정 폭력


아동 폭력 사건. 그리고 가정 폭력 사건. 사건에 따라 집중적으로 주목받을 시기가 있고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 하는 시기도 있지만, 주목받는 정도에 상관없이 매년 평균 10,000 건을 웃도는 가정 폭력 사례가 경찰 주도 하의 형사 처벌로 입건(대한민국 통계청의 [2013년 가정폭력 실태조사] 중 경찰청 제공 자료)되고 있습니다. 수면 위로 드러나는 정도가 10,000건 정도이니, 대체로 가정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특성상 다른 범죄와는 달리 밝혀내기 어려움이 있는 가정 폭력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사건까지 고려하자면 충분히 중대한 사회 문제라고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나만이 없는 거리」는 이런 가정 폭력 사건을 들춰내는 일의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요가 월요일만 되면 학교에 늦게 오는 것, 그 때마다 옷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는 부분에 선명히 보이는 멍 자국과 상처의 흔적, 어떻게든 최대한 밖에서 시간을 보내며 집에 늦게 들어가려고 하는 모습 등등, 이미 겉으로 드러난 근거는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확실한 증거들이 심심찮게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그 모든 것을 가정이라는 개인적인 영역에 숨겨버리고 있을 때엔 그것이 카요를 학대하는 정보로 함부로 연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분명히 가정 폭력으로 모일 수 있는 이 증거들은 안타깝게도 '크게 넘어져서 생긴 상처다', '그냥 늦게 가는 게 좋아서 그랬다' 등의 이야기로 진술되면 법적으로 손 쓸 방도가 없게 되죠. 무턱대고 가정 안에 진입해 현장 증거를 잡자고 해도, 순순히 현장범으로 증거를 확보하면 좋겠지만, 미리 낌새를 눈치채고 증거를 눈치챈 상태에 들이닥친 것이라면 '난 범죄자가 아닌데 사적인 공간인 집에 침입하냐'는 사생활에 대한 권리라는 측면에서 역공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시나 증거를 확보했다고 해도, '증거도 없이 범죄자로 상정해 사적인 영역을 침범했다'고 살짝만 바꿔 말하면, 사람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것을 막기 위한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하는 이유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떠안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무턱대고 진입하는 방식 자체가 여러 가지 위험을 떠안고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넘어졌어."

보는 모두가 답답했을테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애석하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 당사자를 가해자라고 인정하게 만드는 제일 어려운 방법을 제일 이상적인 방법으로 채택하게 됩니다. 전체적으론 인정하지 않는 발언을 한다고 해도 가해자일 가능성을 내포하는 진술이 확보된다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어렸을 적 사토루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야시로八代学 선생님은 작년 5월부터 카요가 가정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아동 보호 센터에 카요의 엄마와 접촉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카요의 엄마인 아케미가 그 때마다 낌새를 눈치채고 집을 비워서 아동 보호 센터의 직원들과 접촉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카요의 보호 조치를 쉽사리 집행할 수 없었죠.



누구나 뻔히 알지만 누구도 함부로 해결해줄 수 없는 이런 집안 사정에서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고 의지가 되어야할 가정과 부모님으로부터 원초적인 폭력으로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카요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 같은 건 다 거짓이라는 자세를 취하게 되죠.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 작품의 제목이자 카요의 글짓기 제목인 ‘나만이 없는 거리’입니다. 나만 있을 수 있는 섬에서 나하고 싶은 대로 살며 나만이 없어진 세상을 보며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내용인데요. 이 내용을 뒤집어보면 ‘내가 사는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으니 혼자 살고 싶다’는 의미로,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회에 적응해 나가야 하는 시기에 나올 수 있는 생각이라곤 보기 힘들죠.


“히나즈키의 글짓기는 명백하게 SOS였다.”

그렇기 때문에 카요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로 모든 사람들을 사양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카요에게 신경 쓰는 사토루를 사토루의 친구들이 억지로 카요에게 떠밀었을 때, 카요는 곧장 사토루가 진심으로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 받기 위해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려는 척 연기하는 것이라는 간파한 말을 던졌습니다. 정말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면 특별히 각별하게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아닌 사토루에게 초장부터 사토루의 핵심을 파고드는 말을 하는 것은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토루가 카요에게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조금씩 열고 자신의 생일 파티 초대장을 건넸을 당시 카요가 사토루에게 보여줬던 행동이 일반적인 여자 아이의 반응 못지 않았던 것을 보면, 카요도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 남에게 관심 없는 척 연기하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정리하자면, 아무도 안 믿는다는 카요의 행동은 결국 반대로 누구라고 믿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의 반어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토루가 스케이트 대회에서 매일 피나는 연습을 하는 아이스하키 부의 유망주인 하마다浜田コウイチ 군을 이길 수가 없어서 일부러 져줬을 때 하마다 군과 더불어 카요에게도 대차게 한소리 들었던 것은 바로 사토루가 열심히 달리겠다고 했던 말을 배신하고 거짓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29살의 자아를 가진 11살의 사토루(생일이 지나기 직전)가 카요의 글짓기를 보고 ‘명백하게 SOS다’라고 말했을 만큼, 카요는 그만큼 심리적으로 ‘믿음의 기반’을 만들어낼 시기에 사람에 대한 믿음을 찾지 못 하고 방황하고 있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두 번의 리바이벌을 거치며 예전처럼 그저 사람들과 잘 지내는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사람과 자신을 믿게 된 사토루와, 이런 사토루의 모습을 본 켄야小林賢也를 비롯한 친구들이 이 사토루의 진심에 행동을 같이하게 됩니다. 그 외에도 사토루의 진심을 전달받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카요의 사정은 드디어 바깥으로 드러나게 되죠. 큰 분량을 들여 자세하게 설명된 것은 아니지만, 몇 개의 이미지와 아케미의 엄마의 언급으로 역시 남편의 가정 폭력에 크게 시달렸던 아케미가 남편과 이혼한 이후 남겨진 카요에게서 보이는 남편의 잔상을 느끼며 그 때부터 카요를 향해 폭력을 휘둘렀다는 뒷사정이 드러납니다. 아케미는 그제서야 딸을 학대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카요는 할머니의 밑으로 거둬지게 됩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곳은 참 얄궂은 곳입니다. 부부는 그나마 취사 선택이라도 가능하지 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가정은 꼭 그 부부의 가정 아래에서 태어나야할 어떤 개연성도 없이 살아가야할 환경으로 주어진 곳일 뿐이죠. 요새는 태어났을 때 제일 먼저 얼굴을 보는 사람은 산부인과 의사 혹은 간호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게 되곤 하지만, 태어난 아이가 제일 먼저 접하는 인간 관계는 부모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인간 관계의 첫번째인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두 번 말하는 것도 입이 아플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모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그 가정 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뿐만으로 부모가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장 어린이가 아니라, 한 때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던 어른이자 부모인 아케미조차도 자신이 낳은 아이를 온 몸에 피멍이 날 정도로 두들겨 패는 사람으로 돌변하는데, 하물며 그 행동이 아이에게 끼칠,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카요는 그래서 세상에 믿을 사람이란 없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그 상황에서, 11살이라는 나이를 고려하자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을 무려 그 때까지 견뎌온 것이구요.



그런 카요가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 혼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통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 또한 카요에 대해 좀 더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위에서 한 번 언급했던 사건들은 물론이고, 버려진 버스에서 며칠 간의 유괴극(?)을 펼쳤을 때 사토루를 대하는 카요는 사토루가 처음 카요를 만났을 당시의 분위기와는 다른 온도를 보이고 있는 것 또한 가정 폭력 사건만 아니었다면 평범한 아이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구요. 특히 카요를 집에 데려올 것으로 직감적으로 예상한 사토루의 엄마 사치코藤沼佐知子가 카요에게 부모와 함께 즐겁게 목욕하는 일상, 그리고 화려하진 않아도 정성스러운 마음만큼은 한가득한 직접 요리해준 식사를 먹는 일상을 보여주는데요. 카요가 이런 ‘펑범한’ 대접을 받고 매번 인스턴트 식품이나 빵으로 때워야하는 대접을 받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제까지의 시크한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는 눈물을 흘렸죠. 이 장면은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이 아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우리가 겪고 있는 평범한 일상 뿐이며, 더 나아가 조금이라도 좋으니 관심을 보내주는 것이 좋다는 메시지를 잘 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제일 짠했던 장면


주인공은 사토루였고, 사토루가 움직인 이유는 카요가 아동 학대를 당하는 것을 막는 것에만 있지 않았기에 이 작품의 중심 주제가 아동 학대만이라고 하기엔 전체적인 주제가 좀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하고 있기는 합니다. 사실상 거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이 눈치가 매우 빠른 사치코나 아케미의 엄마라는, 전황을 크게 뒤집을 수 있을 인물을 등장시켜 아동 학대 문제를 해결하는 현실을 치열하게 그렸다기 보다는 충분한 디테일만 살려주는 수준으로 해결하고 넘겼다는 이야기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동 학대라는 소재 또한, 사람에 대해 믿고 싶은 마음을 어떤 사람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피해자 카요를 등장시켜 ‘신뢰’라고 하는 이 작품의 큰 주제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가정 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의 문제를 큰 틀에서 보여줄 만큼 보여줬기 때문에, 비록 소재에서 머물렀다고 이야기가 나왔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사점을 던져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믿음에서부터 성장하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자신이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희망을 좌절당했지만, 한 사건을 계기로 어느새 모두를 지키기 위한 정의의 히어로가 되어버린 한 소년이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이 청년은 어딘지 모르게 혼자 있다는 인상을 잔뜩 풍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연락하는 친구도 없어보이고, 그렇다고 또 특별히 남들과 각별히 지내고 싶은 것도 아닌 의욕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만화가로써의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는 이 청년은 ‘리바이벌’이라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능력은 어떤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나는 예감이 들 때 시간은 얼마 전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되는 일종의 타임 슬립 능력이었죠.


참고로 이 나비 연출은 만화책에는 없는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연출이고, 어떤 작품의 오마주라고 하네요.

어떤 작품인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같이 사는 엄마 사치코가 살해되는 사건은 ‘리바이벌’ 되지 않았고, 마침 집 근처를 나온 이웃집 주민에게 타이밍 나쁘게도 범인으로 의심받을 만한 상황으로 몰려 본의 아니게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리바이벌’이 일어나고 시간은 평소 때와 같은 잠깐 전이 아닌 카요를 비롯한 2명의 어린이가 희생된 연속 살인 사건이 일어난 초등학교 5학년 시절로 돌아오게 되죠. 이 예외적인 ‘리바이벌’이 일어난 것을 보고 이젠 한 소년이 되어 버린 청년은 이 때의 사건이 어쩌면 엄마 사치코가 살해된 이유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 직감합니다. 그리고 29살의 그가 ‘알고 있었으니까 움직이기라도 했다면 지킬 수 있었을 건데’라며 후회하고 있던 사건, 특히 그 사건의 첫 피해자였던 카요의 구출에 힘을 쏟기 시작하죠.



그 과정에서 카요가 엄마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카요가 살해되는 날이었던 3월 1일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전력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카요는 다행히 3월 1일을 넘어서, 3월 2일 카요의 생일이면서 동시에 소년의 생일이었던 날을 소년의 집에서 즐겁게 보내며 모든 일은 해결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날인 3월 3일, 카요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카요가 살해된 것을 시작으로 '리바이벌'에서 결국 뭔가를 바꾸지 못 한 채 다시 범인으로 쫓기는 지금으로 돌아오게 되고 맙니다. 남의 불행을 모른 척 하지 않고 도와주려는 청년의 모습을 봤던 아이리片桐愛梨는 청년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 묻는 청년에게 아이리는 자신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렸을 적 마을에서 초콜릿 절도 사건이 일어나자, 사소한 소문들로 아빠가 점점 초콜릿을 훔친 범인으로 몰리게 됩니다. 결국 그 일로 아빠는 마을을 뜰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엄마는 '사실은 범인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했었다는 이야기였죠. 아이리는 아빠가 절대로 절도 사건을 벌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은 자신이 믿는 것에 달려있고 그것이 또한 나를 믿어달라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를 해주게 됩니다. 이런 아이리를 비롯해 그 청년의 주변 인물들 모두가 서로가 믿고 싶은 사람들을 향해 행동하며 그 청년을 도와주거나 혹은 곤경에 처하게도 하죠. 그리고 청년은 엄마가 아나운서였을 당시의 동료였던 기자 마코토澤田真를 만나게 됩니다. 마코토는 사치코가 자기 엄마를 죽일만한 아들을 키울 리가 없다며 청년을 믿어주고, 모든 게 자신의 실수라고 말하는 청년에게 말을 전합니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자만이다."

청년에게 뭔가 다가올 만한 말을 건넨 마코토는 청년은 사치코의 살해범이자 카요가 관계된 연속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에 대한 정보를 건네줍니다. 그리 고 그 날, 그 청년을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추적당해 집의 방화 사건에 휘말렸다가 다행히 몸을 회복한 아이리를 청년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청년은 엄마에게 '너의 아빠를 믿어줬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말을 듣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와주려는 아이리를 의지하며 퍼즐의 조각들을 맞춰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범인을 향한 중요한 단서는 맞아떨어지지 않았고, 그에 초조해 하는 청년의 모습을 보며 아이리는 자신도 생각해가면서 하라는 말을 전합니다. 그러자 청년은 자신이 그린 만화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이의 주변을 구해주려고 했던,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도 그 아이는 구하지 못 했고, 그 일로 인해 불행해진 주변 사람들만 늘어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초반에 '남에게 관련하는 게 아니다'고 독백했던 청년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있고, 실제로도 나의 이야기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아이리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남들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건 사신이 혼자 그렇게 단정한 거야."

이것은 엄마 사치코의 동료였던 마코토가 청년에게 전해준 말이자 사치코의 말이기도 했던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자만이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쉬운 말로 길게 풀어 말하면, 뭐든 자기만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실제보다 뛰어난 사람이니 모든 일이건 자신만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지만 어째서인지 그 일은 해결하지 못 했다는 말로, 결국 나 잘났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죠.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이 청년이 리바이벌로 인해 몇 가지 불길한 일을 해결할 때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도와달라고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특히 카요의 일로, 내가 그 때 말만 걸어서 같이 있기만 해줬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텐데, 라는 후회에서 남에게 얽히면 불안해지기만 할 뿐이니 타인과 연관되는 건 마이너스일 뿐이란 생각이 태어났고, 겉으로는 타인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나는 타인에게 믿음을 줄 그릇이 아니라는 낮은 자존감과 타인에게 믿음을 얻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 방식이기도 했고 아이리는 이것을 어딘지 모르게 카요가 떠오르는 '바보야?'라는 말을 곁들여 반박합니다. 이 이야기 직후, 청년은 아이리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마음을 다 잡지만 타이밍 나쁘게 경찰이 들이닥치며 청년은 결국 아무 것도 해내지 못 한 채 경찰에 잡혀들어갈 위기에 처합니다. 그 때, 그 장소에 자신을 보며 서 있는 한 사람이 이 모든 사건의 원흉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청년은 다시 한 번 ‘리바이벌’을 외치고 다시금 18년 전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시 소년이 된 청년은 이제 잘 하고 있건 아니건,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마음으로 좀 더 필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년의 이런 마음을 느꼈던 친구 켄야는, 사람들과 진심을 통하기 위해선 이렇게까지 파고들어야 하는 거라며 나를 꾸짖는 것 같았다는 말을 소년에게 전하고서 카요를 구하는 일에, 더 나아가 연속 유괴 살인 사건을 막기 위해 소년에게 힘을 보태게 됩니다. 카요를 구해내면서 자신에게 친구에게 다가가는 것은 용기를 내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주던 쥰白鳥潤, 일명 유우키(용기勇気) 형이 용의자 선에 오르지 않도록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도와주며 또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죠. 켄야 뿐만 아니라 히로미杉田広美의 도움도 얻고, 카요의 가정 폭력 사건을 해결하게 위해 아동 센터에서 조치를 취하고 있었던 야시로 선생님, 아들의 행동을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던 엄마 사치코 등의 도움을 어느 새 받기 시작하며 카요는 소년의 의지대로 가정 폭력의 집안에서 벗어나 할머니의 품 안으로 무사히 거둬지게 됩니다.



카요의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카요의 몸을 피하기 위해 사용했던 버려진 버스가 있던 곳 근처의 학교에서 또 다른 사건의 희생자였던 아야中西彩를 만났고, 이번엔 유독 카요에 친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등을 밀어줬던 카즈(カズ, 풀네임이 공개되지 않음)가 아야를 소년의 무리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역시 아야 또한 사건을 피해갑니다. 그리고 이 일련의 사건들을 해결하며 혼자 있는 것으로 범죄의 타겟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또 다른 피해자, 히로미 또한 보호하게 됩니다. 이렇게 소년은 미래의 자신에게 평생의 후회이자 상처로 남은 사건을 해결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과거 소년과 카요가 급식비를 걷는 당번이었을 때 소년의 실수로 걷은 급식비를 잊어버렸을 때, 카요가 범인이라고 밀어붙이는 발언으로 친구 사이에서 겉돌게 된 미사토柳原美里가 혼자가 되어 범죄의 타겟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역시나 소년은 미사토를 구하기 위해 하마다가 경기를 하는 아이스 하키장으로 향합니다. 미사토가 사라지고, 그 근처에 또 다시 시라토리 식품의 자동차가 나타난 것을 보고, 소년은 야시로의 도움을 받아 그 일을 막기 위해 시라토리 식품의 트럭을 쫓아가죠. 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건의 원흉인 야시로가 꾸민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소년은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야시로는 자신의 미래를 안다고 말하는 소년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한겨울의 찬물에, 어린 아이의 몸으로 던져진 탓에 소년은 15년간에 중태에 빠지고, 기적적으로 깨어나게 됩니다. 사치코가 15년 동안 묵묵하고 헌신적으로 소년의 치료에 전념한 결과 생긴 기적이었다는 것을 이젠 청년이 되어버린 소년은 알게 되었고, 소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변호사가 된 켄야와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히로미를 만났고, 가정 폭력의 위기에서 벗어나 행복한 가정을 꾸린 카요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소년이 나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모금 활동에 제일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사람이 미사토였다는 것도 알게 되죠. 그리고 집안 사정으로 니시조노 마나부西園学로 이름을 바꾼 야시로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자신의 주변 사람을 해쳤던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현실들을 바탕으로 야시로를 간파한 말을 던진 후 마지막 승리를 가져가게 됩니다.


“이번에도 이기는 건 나야!”

이 청년은 남에게 자신을 간파당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원더가이ワンダーガイ와 같은 영웅이지만, 나는 그런 히어로가 될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영웅이라고 간파하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그리고 그저 지켜보는 것만 하다가 해결할 수 있었던 일도 해결하지 못 했던 과거때문에, 내가 영웅이 되고 싶었다는 마음에 자신이 파고드는 것조차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금방 무슨 일인지 눈치채는 게 빨라서 ‘요괴’라고 부를만큼 엄마가 싫었고, 첫마디부터 ‘넌 지금 가면 쓰고 있지’라고 했던 카요가 싫었습니다. 누구보다 정의의 편에 서있지만, 나는 정의의 편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솔직한 말은 마음에 가둬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내 마음 안에 정의의 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타인과 함께하면 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혼자서 해결하며 ‘마이너스가 되는 일이 단지 플러스 마이너스 0가 되거나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청년은 처음부터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이죠.


“나는 파고드는 것이 무섭다.”

하지만 내가 지금 당장 그런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그닥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시나 내가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미리 판단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카요를 유괴(?)한 일에 대해 논의할 때, 내가 어떻게든 책임질게, 라고 했던 소년의 말을, 그냥 내가 원해서 그랬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 라는 카요의 발언에 맹점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이 소년이 넘치는 정의감과는 달리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그닥 뛰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켄야는 그런 발상을 하지 못한 소년을 향해 말했다고 소년은 전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히어로는 그런 사람이야.”

11살 소년의 몸으로, 자식에게 폭력을 가하는 어떤 무서운 어른과 자신의 생명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과 맞서며 청년은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진심을 다했고, 그 진심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해주며 도움의 손길을 뻗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용의자 리스트에 올라갈 수 있을 사람임에도 카요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는 모습에서 혹시라도 내게 아빠가 있었던 이것이 아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그 야시로 선생님이 미사토를 추적하는 차 안에서 범인임을 밝혔고, 너무나도 믿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청년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큰 위기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진심을 마주하고 소년의 도움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소년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고, 소년은 15년간 잠들어서 ‘나만이 없었던 거리’에 자신이 지켜냈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갔다는 것을 자신의 보물로 끌어안게 됩니다.



히어로라고 하는 사람은 생각해보면 멍청한 인간입니다. 최근 조금씩 패러다임을 달리한 영웅은 예외로 한다고 해도, 정통적인 히어로 이야기에서 영웅들이 어떤 역경 없이, 그리고 배신 당하는 일 없이 세계를 구하는 결말에 도달하는 이야기는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적이 갖가지 이유를 대며 이번만은 살려달라고 비는 걸 굳이 딱하다고 살려줘서 나중에 더 강해져서 돌아와 온갖 생고생을 다하는 경우도 있고, 잘나가는 히어로를 음해하는 세력들에게 꼼짝없이 누명을 뒤집어 쓰고 오해를 받다가 가까스로 그 오해를 푸는 에피소드도 많죠. 히어로가 곤경에 처하는 몇몇 에피소드는 정말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사전에 그 곤경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할 수 있었을 때도 제법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히어로는 그런 ‘멍청한’ 짓을 정말 멍청한 짓이라고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기어코 하고야 맙니다. 비록 그 길이 돌아가는 길은 될 수 있지만, 히어로는 그래도 마지막엔 자신이 ‘믿던 바’를 이루게 되죠.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다시 말해 한 청년이 어떻게 믿음이라는 것을 만들어나가는지를 배워가는 성장 스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여나 이 청년처럼 자신이 소망하던 바를 이루지 못 해도 상관없습니다. 진심을 다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굳이 자신이 진심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느끼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진심을 다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건 간에 모두가 그에게 격려의 말을 전달해주고 있을 겁니다. 그 진심에 동요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을 역시 진심을 다해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 청년의 평생 우상이었던 원더가이 또한 처음엔 혼자서 외롭게 모두를 지키는 일을 시작했지만, 어느 새 그 진심을 알고 모여든 동료들과 함께 모두를 지켜낸 것처럼 말이죠.



4) 선과 악의 경계선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 작품은 여러 모로 범인이 누군지 궁금해야하는 스릴러 치곤 범인에 대한 힌트를 제법 많이 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저는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원작 만화에까지 해당되는 이야기인지까지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연출적으로 별일이 없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세세한 부분까지 자꾸 조명을 받는 캐릭터가 있었으니, 바로 야시로 선생님이었습니다. 카요의 일로 상담한 사토루를 보내고 혼자 남은 교무실에서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은 단독샷을 많이 받기도 했고, 오른손의 검지 손가락으로 툭툭 치는 손버릇 또한 이상할 만큼 집요하게 보여주면서 작품은 의도적으로 야시로 선생님에게 '설마'라는 감정을 지속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연출이 돋보입니다.


이게 왜 계속 조명되는 거지, 라며 이질감을 느끼게 했던 야시로의 손버릇


범인이 보통 작품의 끝자락에서 공개되는 스릴러 장르의 일반적인 특성상, 야시로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던져줘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마땅히 했어야할 범죄를 모조리 방해하고 다닌 사토루를 굳이 살려두고서 또 굳이 깨어난 사토루의 앞에 나타나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에서 야시로에 대한 어느 정도 뒷설명은 주는 방향도 고려함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야시로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거미줄이 보이는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든가 '난 널 죽일 수 없어'와 같은 다소 직관적이지 않은 비유나 추상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선 몇 번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제일 맞을 것 같은 용어를 야시로에게 주자면 소시오패스라는 말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전문적인 설명이 아닌 대략적인 개념으로 상정한 이야기이니 공신력 측면에서 너무 신뢰하지 말아달라는 말씀만 드리고, 간단히 말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있는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소시오패스라고 하는 것은, 야시로가 탈출할 수 없는 물병에서 살아남은 햄스터 ‘스파이스’를 보고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하고 있고, 사토루를 살려둔 것 또한 사토루가 마치 ‘스파이스’와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뒤집어서 말해 ‘지금 이 사람은 내가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치고 있구나’하는 감정적인 공감 능력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절대로 사람에게 원한이 있다거나 극단적인 이야기로 성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살인은 나만이 볼 수 있으면 그만이었고, 나만이 알 수 있는 살인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는 면에서 소시오패스에 근접하고 있다 볼 수 있겠습니다.


“내가 손에 넣는 것은 내 손에 의한,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죽음이다."

당연히 이 사람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악당입니다. 특히나 어린이를 상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학부모에게 큰 불안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친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구멍을 메우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수식어를 살짝만 바꾸면 갑자기 이 사람은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위험한 발언일 수는 있겠지만, 바꿔말해 이 사람을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사람을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고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야시로가 일으킨 사건 덕분에 ‘리바이벌’이라는 특수한 능력이 있었던 사토루가 그 사건을 막아내며 카요의 가정 폭력이라는 문제를 밖으로 끌어냈고 혼자 다녀서 범죄의 타겟이 될 수 있는 아이들을 끌어들여 안전하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그의 역할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자유가 보장된 만큼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보장해줘야한다는 것이 제 생각인지라 저는 야시로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연쇄 살인범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굳이 위험 부담을 감수하며 꺼내는 이유는, 이런 사회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악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온 집을 다 부수고 다니는 태풍이 바닷물을 섞어줌으로써 바다를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연쇄 살인 사건이 없었을 때도 사토루가 카요를 가정 폭력으로 인한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전력을 다했을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이들은 오히려 ‘연쇄 살인 사건’이 있었기에 살았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결국 선의 반대가 악이고 악의 반대가 선일 뿐, 애당초 악에 나쁘다는 가치 판단이 더 많이 들어간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며 살아가야하는 사회인이기 때문에 같이 살아가는 규칙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정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야시로가 자신의 정체에 접근한 사토루를 죽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 일반적인 생각일테지만, 그 생각을 뒤집고 사토루를 살려줬다는 것에서 그리고 어느 새 사토루를 죽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에서, 선과 악은 단지 동전의 양면처럼 필연적으로 붙어있고 빛이 있으면 생기는 그림자처럼 자연스레 따라오는 대립 관계일 뿐이죠. 악이 있으니까 선은 움직이고, 선이 있으니 악은 그 선 안의 모순을 파헤치려고 하며 서로가 창과 방패의 관계를 주고 받습니다.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절대 선의 모습을 보여준 사토루를 절대 악인 야시로는 죽일 수 없었고, 그것을 간파한 사토루는 야시로를 사회의 방식으로 처벌받도록 유도하는 것에 성공하게 되죠.


“난 이제 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같은 맥락으로 야시로가 떠올렸던 단편 소설 ‘거미줄’의 주인공 ‘칸다타’는 나쁜 사람으로만 규정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거미 한 마리를 살려줬다는 이유로 하늘에서 거미줄을 내려줬다는 것은 애초부터 칸다타라는 인물을 나쁘게만 볼 의도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칸다타가 그 거미줄을 타고 올라오려는 사람들을 차버리며 그 기회를 날려버리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내용이었고, 야시로는 스파이스를 본 이후로 거미줄이 보이는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들을 밀어내는 행동을 했던 칸다타를 떠올리며 거미줄이 달린 인간이란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라는 의미 부여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많은 악행을 저질러서 칸다타처럼 지옥에 다시 떨어져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비약 넘치는 의미 부여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을 좀 더 스토리의 맥락에 맞게 정제하자면 이 사람의 정체는 마땅히 살아야할 선인지 마땅히 없어져야할 악인지 구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을 끌어내리는 시도를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살아감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그 의지가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흥미가 있었다는 이야기까지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 야시로의 위에도 역시 거미줄이 있었고, 야시로의 행적이 사토루의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나서 그 거미줄이 끊어지는 연출은 단순히 칸다타가 행한 것이 대체로 악이었기 때문에 처벌받았다는 의미라는 간단한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채우지 못 했던 자신의 구멍을 다른 것도 아닌 선의 입장에 섰던 사토루가 메워줌으로써, 결국 야시로의 정체도 절대 선이거나 혹은 절대 악이라고 단정지어 판단하기 어려운, 선과 악의 경계선에 있는 복잡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할 수도 있겠네요.



5) 리뷰를 닫는 이야기


“믿을 수 없는 사회 안에서 믿는 것이 해줄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모순 투성이입니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정해진 룰을 지켰는가 어겼는가는 명백한 그렇다 아니다의 문제지만, 그 행동 하나만으로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명백히 할 수 있느냐고 한다면 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믿을 놈 하나 없는 사회라고 말들 하지만, 정말 믿는 사람 하나 없이 살고 있느냐고 한다면 또 그것도 아닐 겁니다. 카요와 같이 사람 때문에 근본적인 인간에 대한 신뢰가 박살이 났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불신의 병을 치료하러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은 사람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 또한 재밌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니메이션 한정으로, 결말은 다소 미묘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이리 또한 사토루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카요의 사건을 해결해나가며 성장하는 사토루의 이야기에 중심을 맞추고 그렇기에 이야기의 중심을 사토루의 소년 시절로 줄 수 밖에 없었기에, 아이리에 묘사나 아이리에 대한 사토루의 심리 묘사가 많은 부분 잘리면서 아이리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미묘한 결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또 유독 미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토루의 소년 시절의 이야기에서 각별하게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카요가 사토루가 깨어난 이후 히로미의 아내가 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사토루가 결론적으로 얻은 것이 다소 성인의 경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되어 안타까운 느낌을 자아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까지 카요와 사토루가 어떤 관계였냐를 생각하면 어딘지 미묘해지는 재회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토루가 일반적인 시선으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길 바라는 것이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결말이 아쉬웠다는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카요의 말에서 깨어있지 못 하는 사토루를 두고 우리만 행복해져도 괜찮을까, 라고 고민한 진심이 많이 묻어나고 있지만 또 그와는 다른 결론으로 우리가 행복해져도 괜찮다는 결론을 냈다고 말하고 있죠. 생각해보면 둘 다 크게 반론의 여지를 던지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나를 구해주고 희생한 사람은 수십년간 깨어나지 못 하고 있는데 정작 그의 구원을 받은 나는 행복하게 있는 것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하지만 그게 나를 구해준 것은 내가 행복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나는 행복해야한다는 의지를 느끼는 것도,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가는 결론이 모두 틀린 결론이 아니라는 것에서 역시나 또 사람은 모순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이런 모순 가득한 인간들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 믿음이라는 녀석이니, 믿음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믿는다는 건 이상한 말이구나.

그게, 정말 진심으로 믿는 거라면 믿는다는 말은 필요 없잖아?

공기가 있다고 믿는다 같은 거 말이야."

"의심하니까 믿는다, 같은 거?"

"그렇다고 해서 믿는다는 말이 거짓말 같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야.

믿는다는 말은 믿고 싶다는 희망의 말일 거야,

라는 거."


이 믿을 수 없는 사회 안에서, 믿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믿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며 한걸음 한걸음을 나가야하는 이 사회의 초년생들을 위해서, 지금 나 자신이 용기가 없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툴러도 시작해보는 상황에서 용기가 생기는 것이라는 믿음을 담은 이 이야기를 전달해보며, 사토루와 카요가 원했던 최고의 행복인 “나만이 없는 거리”를 여러분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도 같이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Google 이미지 검색에서 발췌




업로드가 정말 많이 늦어졌습니다. 학기 초니까 본격적으로 수업이 들어가기 전엔 시간이 있으니까 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오산이었습니다. 이제 조금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해야하는 것에 쫓겨다니는 느낌이네요. 사정이 있어서 올해는 어떻게든 최대 학점을 꽉꽉 채워 눌러넣었는데, 평소보다 수업 2개 정도 더 얹는게 이 정도 무게감일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요.


그래도 기한을 늦춰서라도 연재 방식을 유지하는 게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은 사람도 그리고 이야기를 하려는 저도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블로그 활동에 정기적인 날짜를 정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적어도 올해는, 이번 1학기와 2학기 시즌 전부 학기 중에는 연재 정기화를 잠시 정지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예 학기 중엔 포스팅이 안 올라갈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갑자기 어느 날 왔더니 이 블로그에 새로운 포스팅이 생겼다면 모처럼만에 여유가 생겨 포스팅은 준비해 올린거라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제나 포스팅을 기한보다 늦게 올리는 지각생이었던지라 더더욱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저도 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이야기는 늘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우선 순위를 밀어두게 되었음에 양해를 구함과 동시에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래도 가끔씩 생각날 때 들러주셔서, 이 인간이 또 무엇을 가지고 떠들고 있나 지켜봐주시고, 또 언제든 제게 말을 걸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방학 때까지만 잠시 비정기적으로 뵙겠습니다!




( + 덧붙이기) - 2017.03.23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 댓글)


오프닝 테마 "Re: Re:"가 원래 ASIAN KUNG-FU GENERATION의 2005년 발매 2번째 앨범 "ソルファSol-fa"의 수록곡이고


「나만이 없는 거리」가 애니메이션화 될 시기(2016년)에 재녹음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제보대로 영향 관계를 확인하자면, 노래가 만화의 영향이 아니라 만화가 노래에 영향을 줬다는 서술이 맞겠습니다.


제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