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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재방영(상영)관

#3-1. 달걀, "말"을 말하다 (애니메이션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1부)



애니메이션 이야기하는 낭인,

스카이포스터입니다.


유튜브를 지켜보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번주는 콘텐츠를 다시 기획하게 되어 영상이 한 번 엎어졌습니다. 덕분에 영상도 한 주 늦게 등장했고, 영상이 완성된 후 작성하는 포스트로도 이제야 뵙습니다. 한동안 블로그가 잠잠했을 건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트라우마”. 이런 단어를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본래는 겉으로 보이는 외상이란 외과적 용어에 불과한 단어지만 “정신적인 장애를 남기는 충격”이란 심리학적 용어로써 이해하는 게 일반적이죠. 그래서 “트라우마”를 사회적인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의 큰 충격 정도로만 이해하는 경우도 많죠. 이 작품에서 쥰의 달걀 트라우마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의미를 정신적인 ‘장애’가 아니라 ‘충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트라우마는 사실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의 캐릭터들은 모두 쥰의 달걀을 매개로 연결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러면 도대체 이 작품의 달걀이 무엇이길래, 쥰 만의 트라우마 현상인 달걀이 사실은 이 작품의 모든 캐릭터와 연결되었다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이번은 이 쥰의 달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스카이포스터의 애니메이션 재상영관]
세번째 이야기.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첫번째 대화를,

“달걀, 말을 말하다”란 제목을 걸고 시작해보겠습니다.



※ 이 포스트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달걀이란 표현에 관한 힌트는 이 작품의 처음, 타쿠미가 길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좋은 여자랑 잘 되고 싶다든가 그 녀석을 패주고 싶다든가, 뭐라도 되지.

그걸 이렇게 바치면 공물 대신이 되지.

(말을 바치면) 뭐... 좋은 일이든 뭐든 일어나지 않겠어?”


이 이야기의 요약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달걀 안에 내용물은 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이 좋건 나쁘건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저씨가 예로 든 말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달걀 안에 바치는 내용은 내 본심에서 더한 것도 뺀 것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진심에서 나오는 말들이죠.


이 점을 고려하면, 달걀은 그 자체로 말의 형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달걀의 껍데기는 표면으로 들어나는 말의 모습이고, 달걀의 내용물인 노른자와 흰자는 그 말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그 사람의 진심이라는 의미가 되겠죠. 그리고 쥰의 경우는, 아빠와의 사건 이후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단단한 껍데기 안에 꽁꽁 싸매고 아예 말하지 못 하는 모습이 달걀로 표현된 것이고요.


쥰과 타쿠미가 달걀과 연을 맺어서 그 달걀로 이어진 관계라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게 아니어도 쥰과 타쿠미가 특별한 관계로 이어질 것임을 충분히 잘 알 수 있지만, 이에 주목하는 이유는 말을 못 하는 쥰이 다른 사람과 연결될 방법이 달걀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품은 타이틀 화면을 사이에 주고 달걀 트라우마가 생기는 쥰의 모습과 달걀과 말이 연결된다는 것을 아는 타쿠미의 모습을 길게 설명한 것이죠.


이 둘이 달걀과 연을 맺었다는 설명이 끝나자 곧바로 타쿠미가 달걀 노래를 부르는 것을 통해 쥰과 타쿠미가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만남 이후 달걀 트라우마가 생긴 이래 쥰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온전히 문장이 완성된 말을 나레이션을 통해 들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쥰이 타쿠미와 연을 맺으며 큰 변화가 생길 것임을 감지할 수 있죠.



지역 교류회 실행위원으로써의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이 둘은 대화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로의 말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말을 통해 서로에게 좋은 일도 있었지만 한 때 쥰이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나쁜 일도 있었고, 실제로 둘이 서로를 공격하는 나쁜 말을 주고 받기도 했죠.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서로의 진심을 알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로 상처 입히는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론 각자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말의 본질이란 나를 타인에게 보여주고 내가 타인을 알게 되는, 사람과 연결되는 수단입니다. 쥰과 타쿠미가 이어지는 방식은 결국 사람들이 이어지는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거죠. 말로 서로를 알고, 말로 서로를 오해하고, 말로 그 오해를 푸는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천천히 말로 서로를 알아가고 연결됩니다. 이 작품의 캐릭터들이 달걀로 연결되었다는 건, 결국 사람들이 말을 통해 연결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어렴풋이 “무슨 말이든 상관없다”는 아저씨의 말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나쁜 말이라도 상관이 없는 걸까요? 그건 바로 역시 작품 초반에 등장한 말장난인 “달걀에서 점을 숨기면 왕자가 된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어에서 달걀을 의미하는 한자는 玉(구슬 옥) 자와 子(아들 자) 자를 사용하는 玉子(たまご, 타마고)인데, 앞의 玉 자에서 점 하나를 빼면 王(임금 왕) 자가 되어 왕자(王子, おうじ, 오지)가 되죠.


이 작품에서 달걀은 자신을 쥰을 구해줄 왕자라 소개하며 나타나지만, 사실은 쥰을 말하지 못 하게 가둔 트라우마 현상이죠. 구원자, 그리고 쥰을 가두는 위선자라는 결코 같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성질이 사실은 고작 점 하나 차이로 동일 인물 안에 같이 있는 겁니다. 즉, 한 사람이 전혀 반대되는 두 성질을 같이 가질 수 있으며 심지어 두 성질은 종이 한 장 차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거죠.



이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는 건 바로 달걀 역에 배치된 성우인데, 달걀 역에 배치된 성우는 우치야마 코우키 씨로 사카가미 타쿠미 역과 동일 성우입니다. 잘 들어보면 목소리 톤도 비슷하게 연기하고 있죠. 이 성우 배치가 연출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것이라면, 이 성우 배치는 타쿠미 또한 달걀과 비슷하게 이중성이 있는 캐릭터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타쿠미도 쥰에게 자신을 구해줄 왕자라 여겨졌지만, 사실 타쿠미의 마음은 나츠키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쥰을 이 작품에서 제일 큰 위기에 빠뜨렸던 것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생기는 부분이죠.



이런 구조를 하고 있는 캐릭터가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쥰의 아빠입니다. 쥰의 아빠 또한 쥰에게 있어 멋진 왕자님이었지만, 사실은 불륜을 저지르고서 가정을 깨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쥰에게 달걀 트라우마를 남긴 사람이죠. 달걀의 이중성을 타쿠미도, 그리고 아빠도 공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타쿠미나 아빠나 똑같이 쥰에게 상처를 주는 나쁜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건데, 이 둘이 쥰에게 각각 다른 결말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나쁜 말을 던진 그 이후입니다. 아빠와의 대화를 살펴보면, 아빠가 쥰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말을 끝으로 쥰과 아빠와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고 잠깐 있었던 아빠와의 대화마저 아빠에게만 유리한 일방적인 대화의 형태를 하고 있죠. 하지만 타쿠미는 서로가 상대방에게 나쁜 말을 했다는 것을 알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갑니다. 이 때 쥰과 타쿠미의 대사가 상당히 원색적인 표현으로 변해가는데, 이제 둘 사이에 전달해야할 진심이 그 말 말고는 남은 게 없었기 때문이죠. 서로 나쁜 말들이 오고 갔지만 결과적으로 둘이 서로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결과를 만든 건 드디어 자신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표현하는 대화가 이어졌기 때문이죠.


달걀의 특징을 바탕으로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말은 양면성이 있고 또 상대적입니다. 말을 조심해야한다는 이야기는 바로 말의 이런 특징에서 나오죠. 같은 말이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별 거 아닌 말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말을 그럼에도 이어나가야 이유는 말이 자신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말이 그 사람 자신의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상처 입히게 되더라도 계속 말을 이어나가야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말이 자신을 알려주는 것이며, 자신을 알려주는 것으로 사람들은 이어지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일본어에서 달걀은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사회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이죠. “트라우마”를 “극복”한다는 걸 나 자신을 “트라우마”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고자 하는 “성장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모두 달걀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지역 교류회 실행위원인 타쿠미, 나츠키, 다이키가 가장 말이 없는 쥰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맺고 결국은 쥰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다음 포스트에선 이 3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뵙겠습니다.


(2018.09.03 / 내용 추가)



영상과 포스트를 마치고 며칠 후에, 지인으로부터 타쿠미와 쥰의 아빠를 달걀의 특징과 같은 이중성의 구조를 공유하는 캐릭터라 보는 건 너무 나간 해석이 아니냐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타쿠미와 쥰의 아빠는 여러 가지 면을 고려했을 때, 비슷한 부분보단 다른 부분이 더 많은 사람인 것이 맞다는 것에서 타당한 의견입니다. 저 역시 이 점을 생각하고 대본을 짰지만, 얼핏 듣고 넘기기엔 쥰의 아빠를 용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언급은 맞으니 조금 더 부연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타쿠미와 쥰의 아빠가 달걀의 이중성을 공유하는 캐릭터라 언급한 것은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캐릭터들의 상황을 전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우리의 시점보단, 쥰이 보는 시점에 더 중심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쥰의 어렸을 적 사건에 대해서는 간략한 정보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쥰의 아빠가 쥰에게 도통 왕자님이라 보일 근거를 찾기가 어렵죠. 하지만 쥰의 엄마가 글씨를 새긴 수제 도시락을 만들 정도로 정성껏 아빠를 챙기는 모습에서, 아빠의 불륜이란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진 쥰의 집안이 화목한 집안이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아빠와 몇 년을 같이 살며, 부모님과 화목한 관계로 지내온 쥰이라면 아빠를 멋진 사람이라 생각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엄마(아빠)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하는, 부모님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은 어린 아이의 반응이라는 거죠. 그러면 쥰은 아빠를 멋진 왕자님이자 동시에 말로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사람이라고 보고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쥰이 타쿠미를 왕자님이라 생각하는 건 작품에서 충분히 설명된 부분이고, 타쿠미가 의도한 건 아니라고 해도 타쿠미의 말이 한 때 쥰을 위기로 빠뜨렸던 것도 작품에서 나온 흐름이죠. 즉, 온전히 쥰의 시점으로 봤을 땐 멋진 왕자님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했던 말이 내게 상처를 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대화란 오해하고 오해를 푸는 시행착오의 과정이란 메시지를 전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다는 상대성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고, 이건 쥰의 아빠나 타쿠미나, 그리고 이 세상 어떤 사람이건 관계없이 적용되는 말의 특징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말이란 게 똑같다면서 쥰의 아빠는 쥰에게 트라우마를 남겼고 타쿠미는 쥰의 트라우마를 치료해줄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남기에, 제가 이 둘의 2가지 차이점을 잡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대화를 계속 이어가려고 하는가, 또 하나는 대화가 쌍방으로 균형있게 이뤄지는가, 이렇게 두 가지였죠. 이 기준으로 보면 쥰의 아빠는 완전히 실격이어서 쥰에게 상처를 남긴 채 사라져버렸고, 타쿠미는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위기의 쥰을 치유해줄 수 있었다는 이야기죠. 센스 있는 여러분들이라면 의도를 잘 파악하셨겠지만, 언급 자체가 아슬아슬한 선을 걷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지면을 할애해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2부 포스트에 첨부한 영상에, 이 이야기와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2018/09/03 - [애니메이션 재방영(상영)관] - #3-2. 말의 무게를 안다는 것 (애니메이션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