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내멋대로 리뷰].
어김없이 등장한 스카이포스터입니다.
<쿠드랴프카의 차례> 편, 그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저번 포스팅은 <쿠드랴프카의 차례> 편이 왜 「빙과」의 정점이자 하이라이트로 생각하는지 제 의견을 펼쳐봤습니다. 이번 포스팅부터는, 이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화하기 위해 스토리를 짚어가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특히, 제가 저번 포스팅을 통해 ‘기대’라고 하는 단어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죠. 이번 포스팅은 <쿠드랴프카의 차례>에서 부각되는 3가지 주축이라고 언급드렸던 큰 스케일의 ‘추리’-문화제라는 배경의 ‘일상’-사회가 제시했던 룰의 예외상황에 대처하는 ‘성장이란 주제’ 중에서, ‘기대’를 통해 보는 성장통이란 주제를 중심으로 잡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빙과」의 7번째 포스팅을 지금 시작합니다.
※ 이 포스팅은 TV 애니메이션 「빙과」의 스포일러 요소를 포함합니다. ※
※ 객관적인 정보는 일본 위키피디아 및 나무위키를 참고합니다. ※
※ 인용하는 정보에 오류가 있거나, 의견에 대해 이의사항이 있으신 경우 정중한 방향으로 댓글을 달아주시면 적극적으로 반영하겠습니다. ※
※ 현재 보고 계신 포스팅은 「빙과」 연재분의 7번째 포스팅입니다. ※
▲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전 편으로 넘어갑니다.
저번 포스팅에서 막판에 드렸던 이야기를 다시 해보도록 합시다. 보통 ‘기대’라고 하면, 이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일반적으로 ‘기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아마도 친구의 밴드가 하는 공연에 가서 친구에게 ‘오늘 공연 기대할게.’라고 말한다든지,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직장 동료에게 ‘오늘 PT 기대할게.’ 등의 상황을 일반적으로 생각하실 겁니다. 일반적으로 ‘기대’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 상황들을 생각해보자면, 다른 사람들을 응원하는 말로써 많이 사용된다는 느낌이죠.
스스로가 자신이 있을 때는 ‘기대’라는 말을 꺼내선 안 돼.
’기대’라고 하는 건, 포기했으니까 나오는 말이라고.
하지만 ‘남을 응원한다’와 같은 상황처럼 기분 좋은 격려의 의미, 그 뒤에 ‘기대’라는 단어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치명적인 어두운 면을 포함합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가져와봅시다. 친구의 밴드 공연에 ‘오늘 공연 기대할게’라고 말하는 상황을 다시 가정해서, 내가 친구가 하는 수준만큼의 공연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되거나 혹은 그 이상이라면, 나는 친구의 공연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을 해야겠다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기대’가 품고 있는 뒷면의 실체가, 바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이뤄지길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대’라는 단어를 단순히 떠올렸을 때 이 부정적인 실체가 확 다가오지 않는 것은, 대체로 타인이 발휘하는 능력이 나는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애초부터 생각도 없던 분야이거나 이미 마음을 접은 분야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내가 음악에 하등 관심이 없고 음악을 잘 해볼 생각도 없다면, 나는 친구의 밴드 공연에 아무런 부정적인 느낌 없이 ‘기대한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음악을 잘 하건 말 건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이미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정해진 분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타인이 하는 분야가 내가 능력을 발휘하는 분야가 겹칠 경우에는 이 ‘기대’라는 단어를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가 없어지게 됩니다. 처음 나보다 능력이 아득하게 우월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과 동일한 분야에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감정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그 일을 처음 하는 사람이고 나는 이제까지 그 일을 계속 해온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 대해서 더더욱 인정하기가 싫어지겠죠. 누군가는 그 질투를 동력으로 삼아서, 그 아득한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매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그 사람 사이의 능력 차이가 더 이상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제서야 체념을 하게 됩니다. 이 체념과 포기가 생겨야 비로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그 사람이 이뤄질 것이라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되는 ‘기대’라는 말이 성립하게 되죠. 이렇게 ‘기대’라는 말이 나오기까지는 심리적인 불안정 상태를 다시 안정적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들이 숨겨져 있는 셈입니다.
아마도 이 보결 선수의 결말 또한, 절대로 따라 잡을 수 없는 주전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대’라는 주제로 <쿠드랴프카의 차례>를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이 편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행동 동기나 심리가 모두 밝혀지는 마지막 화 [17화. 쿠드랴프카의 차례]를 중심으로 차례차례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사토시가 ‘기대’라는 단어의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간파하는 대사를 기준으로, 그 대사의 앞에 등장한 ‘기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봅시다.
<쿠드랴프카의 차례> 편에서 제일 먼저 ‘기대’라는 단어를 등장시키는 인물은, 문화제 기간 내내 사토시와 만나면서 사토시가 그 존재를 상당히 불편하게 여겼던 인물인 타니 군 1입니다. 사람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인물인 사토시가 이 타니 군을 문화제에서 처음 만났을 때 누군지 기억을 못 하는 묘사가 있다는 것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왔다는 이질감을 주는 인물입니다. 사토시도 그렇지만,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반 친구가 와서 갑자기 ‘나는 너를 라이벌로 생각해왔다’와 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이 친구의 등장은 보고 있는 입장에서도 불편해 보이죠.
이 인물이 필연적으로 이질감을 주도록 배치된 인물이라, 사토시의 말에 따라 “‘기대’라는 단어의 뜻도 잘 모르고 남발하는 ‘국어를 못 하는’ 사람”으로 결론이 지어지기 마련일 텐데, 그 느낌을 걷어내고 생각해보면 타니 군이 ‘기대’라는 단어를 그렇게 이상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토시가 타니 군을 ‘국어를 못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것에는, 물론 타니 군 자체가 ‘기대’라는 단어의 본질을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니 군이 ‘기대’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기대’하고 있는 대상을 제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받아들이는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조금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이렇습니다. 당연히 사토시는 타니 군이 ‘기대’하는 것이 ‘사토시의 능력’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기에, 자신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기대’라는 단어를 하는 것에 대해 타니 군이 ‘기대’라는 단어에 대해 몰지각하다는 인상을 받고 있죠. 하지만 타니 군이 만약에 기대하는 것이 ‘사토시의 능력’이 아니라 ‘사토시와 할 수 있는 팽팽한 대결’이었다면, ‘대결’은 나 혼자만이 할 수 없는 것이고 ‘팽팽한 대결’을 할 수 있는 상대는 사토시 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다’는 의미를 깔고 있는 ‘기대’라는 단어가 그럭저럭 맥락에 맞아 보입니다. 혹시라도 ‘기대’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타니 군의 말 습관에 ‘국어를 못 하는 사람’이라고 깎아내릴 정도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면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니 군이 ‘기대’라는 단어를 잘 알고서 사용하고 있다고 보기엔, 타니 군이 ‘기대’에 대한 자각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타니 군이 상대라고 상정하고 있는 사토시 자체가, 꼭 자신만이 타니 군과 팽팽한 승부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토시는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편에서, 자신이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어딘가를 파고들어가려는 성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죠. 이런 사토시의 입장에서, 특별히 걸출한 능력이 없는 자신과 대등한 승부를 펼칠 수 있다고 특별하게 생각하는 타니 군이, 굳이 사토시가 아니더라도 ‘기대’할 법한 승부를 펼칠 사람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승부가 꼭 사토시여야 ‘기대’할 수 있는 승부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면 ‘기대’가 숨기고 있는 이면의 의미와는 맞다고 보기에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타니 군은 결국 ‘기대’의 의미를 제대로 자각하고 있다 보기엔 어려운 인물이라는 것은 사토시에게도, 그리고 이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에게도 변함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토시가 ‘기대’라는 단어를 정의하기 전에 ‘기대’라는 단어가 사용된 또 한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이리스와 에루의 대화 사이에서 이리스가 했던 말중에 나왔었죠. 에루는 부탁하는 일을 상당히 저돌적으로 행하는 편입니다. 호타로가 에루의 궁금증에 꼼짝 없이 휘말리는 것도 격식이나 남의 분위기를 재는 등의 요소가 없이 원하는 바를 직선적으로 요청하는 에루의 행동력이 한몫을 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루의 이런 저돌적인 모습은, 부탁하는 사람이 자신의 윗사람이라고 특별히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에루가 총무위원장인 타나베 지로田名辺治朗 선배나, 벽신문부의 토가이토 마사시遠垣内将司 선배나, 이리스 선배에게 부탁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에루가 타인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부탁하는 방법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바로 에루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격식이나 기술 없이 직설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호타로가 에루를 ‘은근 무례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던 것은,
이런 에루의 저돌적인 성격이 한몫 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에루는 이번 문화제에서 ‘고전부의 부장’이라는 자리의 책임감 때문에, 고전부에게 벌어진 그 문집의 ‘산’을 처리하기 위해 여기저기 부탁을 하러 다녀야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에루에게 대놓고 부탁할 일이 많아진 시점에서, 에루가 이리스를 만난 것은 딱 적절한 시기였습니다. 비록 결론이 그닥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자신의 누나 말고도 그 ‘에너지 절약’의 호타로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여제’가 바로 이리스였기 때문이었죠. 에루가 부탁하는 일의 기술이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 이리스는 에루에게 부탁하는 기술을 전수해주죠. 이 때 나왔던 말이, “너에게는 ‘기대’를 사용하는 것이 제일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이었죠.
상대에게 ‘나는 기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거야.
이리스는 이 ‘기대’가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상당히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스가 에루에게 부탁하는 법을 전수할 때, 자신에게는 사소하지만 부탁하는 상대에겐 나름대로 중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죠.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는 너보다 능력이 되지 않지만 내겐 중요한 일이기에 이 일을 간단히 처리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너를 기대하겠다는 의미로 바꿀 수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나는 할 수 없지만 너는 할 수 있다는 능력의 격차를 강조해 자신이 부탁하는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만족감을 주도록 하는 것이죠. 이것은 이리스가 ‘기대’라는 단어가 ‘능력의 격차’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낮춰 상대가 무려 그 ‘기대’를 받는 사람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루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부탁을 하는 것보다 더 어색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지어는 부탁하고자 하는 본론을 꺼내지도 못 하고서 대화가 끝났는데도, 이 이상 부탁하면 상대를 의심한다고 돌아서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죠. 이 날의 문화제를 마무리하면서 고전부 부원들이 다시 모였을 때, 호타로가 에루의 모습을 보고 지쳐 보인다고도 말했었고, 그 편이 담긴 [15화. 10문자 사건十文字事件]의 에필로그에서 에루가 “왠지 지쳤어요”라고 독백하는 모습도 있었죠. 말하자면 에루는 부탁하러 다니는 일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루가 부탁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에루의 방송을 들은 이리스와의 대화에서 명백해집니다.
’이런’ 건 저한텐 전혀 맞지 않네요.
음… 그러니까 말이죠.
이젠 억지 부리는 것 같아요.
고전부 4명 만으로는 수습하기 어려웠던 문제 사건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에루가 이 부탁하러 다니는 일 자체를 어려워했던 것은 역시 부탁 안에도 은근 슬쩍 ‘기대’의 심리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번의 경우는 능력의 격차에서 발생하는 좌절감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못 하는 일’이라는 ‘기대’의 가정이, 내가 불가능한 일을 남에게 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부탁하는 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문화제의 격전지인 카미야마 고등학교에서 고전부에게만 갑자기 문집을 판매할 수 있는 장소를 잡아 달라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부탁을 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습니다. 벽신문부도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이었구요. ‘내가 못 하는 일’이라는 것도 분명한 일이었지만, 그 사람도 ‘해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대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은 자신이 못 하는 일을 남에게 지워주는 형태가 되어버립니다. 호타로가 범인을 추적해 계략을 꾸며 고전부에 사람을 모아 문집을 판매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에루가 방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은, 에루가 자신이 못 하는 일을 떠넘기는 억지를 부릴 성격이 안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이 연출은 당연히 에루의 ‘상상’이고, 두 인물 사이의 벽에 붙은 글을 잘 보시면
‘기다려주세요待って下さい’, ‘고전부古典部’, ‘벽신문かべしんぶん’,
‘잘 부탁드립니다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문집文集’, ‘기다릴게요まってます’ 등이 적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에루가 오히려 이리스의 조언을 받고서 부탁하는 방식이 더 엉망이 된 것은, 이리스가 조언했던 ‘기대’의 심리가 자신이 못 하는 것을 남에게 넘긴다는 이 ‘부탁의 형태’를 더욱 부각시켰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부탁하는 대화의 기술이 아직 부족한 문제였다고 넘길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돌려말하는 방식이 오히려 직설적으로 말하는 방식보다 정제가 되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이 ‘기대’하는 심리가 ‘내가 못 하는 일’이라는 사실이 증폭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린 성격의 에루에게 맞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에루 또한 ‘기대감’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빙과」라는 작품은 말씀드렸다시피 주로 호타로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작품이고, 그 외의 인물이 속마음을 직접 드러내는 나레이션 등이 부재하고 있기 때문에, 에루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정확하게 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루가 ‘왠지’ 지쳤다고 하거나, ‘이런 건’ 맞지 않는다는 등, 규정하기 어려운 애매한 대사로 ‘부탁’하는 일이 어려웠다고 말하는 것은, ‘기대’가 품고 있는 이면을 느끼고는 있지만 정확히는 인지하고 있지 못 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제 사토시가 ‘기대’의 의미를 확실히 정의한 그 이후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다음은 ‘기대’의 정의를 정확히 알고 있는, 또는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다음 편으로 넘어갑니다.
- 풀 네임은 타니 코레유키谷惟之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