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애니메이션 읽는 낭인, 스카이포스터입니다.
업로드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네요. 죄송합니다.
이번 포스팅부터 진행할 「빙과」 리뷰 포스팅은, 그야말로 「빙과」의 정점을 찍었던 편인 <쿠드랴프카의 차례クドリャフカの順番>입니다. 제목에 들어간 ‘쿠드랴프카Кудрявка’는 보통 ‘라이카Лайка’라고 하는 ‘품종’의 이름으로 알려진 개의 본래 이름이며, 우주에서 생명체가 적응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러시아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Спутник-2’에 태워 보낸 개의 이름이기도 하죠. 이 개는 우주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우주 과학의 중요한 상징으로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구 소련의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 이 개가 스푸트니크 2호를 실은 로켓이 발사되고 5시간 만에 사망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인류가 진행한 실험의 희생체라는 어두운 면 또한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죠. 과연 이 <쿠드랴프카의 차례>를 중심으로 어떤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지금 <쿠드랴프카의 차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이 포스팅은 TV 애니메이션 「빙과」의 스포일러 요소를 포함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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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드랴프카의 차례> 편은 제가 언급하기 시작한 이래 이 편이야말로 「빙과」의 정수라고 제가 열심히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까지 제 「빙과」 리뷰 포스팅을 잘 따라오신 분들이라면 눈치를 채셨을 겁니다. 제가 「빙과」 리뷰의 첫번째 포스팅에서 이 작품의 매력은 추리 소설이라는 흥미로운 구조를 토대로, 살인 사건보다 훨씬 더 일상적인 사건을 소재로 해서, 그 일상적인 사건에서 성장이란 주제를 얹어내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이 관점에서 <쿠드랴프카의 차례>는 이 세 가지 매력이 잘 조합되어 있는 편입니다
먼저 추리라는 부분을 보도록 합시다. 이제까지 호타로가 해결한 사건이 결코 대단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4가지의 자료를, 그것도 일기 같은 사적인 자료도 아니고 대단히 공적인 자료를 토대로 세키타니 쥰이라는 한 사람의 과거를 완전히 들여다본 것 같이 추적해낸 것도 충분히 놀라운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크게 미끄러지기는 했지만, 이리스 후유미가 부탁한 내용에 가려진 진상을 규명해낸 것도 호타로의 대단한 결과였죠.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다릅니다. 범인을 특정하는 어떤 단서도 없이, 학교에 소속된 사람들은 물론이요 외부자들까지 얽혀 범인의 범위가 학교 내 인원 그 이상을 넘는 거대한 표본에서 시작해야하는 사건이었죠. 처음에 호타로가 이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했던 에루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범인의 범위가 너무 넓다는 지당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토시가 이 사건은 직접 몸으로 움직여 현장 검거를 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낸 것 또한 같은 이유였죠.
범인의 범위가 대충 이 정도
범인의 범위가 넓다는 건, 다시 말해 이제까지 「빙과」에서 호타로가 추리해왔던 사건과는 스케일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 명의 과거를 추적하거나, 영상에서 주어진 소수의 인물 안에서 범인을 특정하는 것과 달리, 이 사건의 시작은 학교 안팎으로 문화제에 어떤 형식으로건 관계되어 있는 수천 명 안에서 범위를 좁히는 일부터 시작해야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호타로가 행동의 의미를 추적해내기 전까지 이 사건에 대해 주어진 정보는 일본어의 50음도 순 1으로 해당 문자로 시작하는 동아리에서 같은 문자로 시작하는 이름의 물건을 훔쳐간다는 범인의 행동 패턴 밖에 없었죠. 이 행동 패턴의 몇 가지 특이점과 사건과는 관계가 없을 것 같이 보였던 한 만화를 단서로 연결시켜 범인을 특정했다는 결과 또한 수천 명을 한 명으로 줄였다는 것에서 상당히 화려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가 더욱 돋보이는 건, 호타로가 이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단 한 번도 몸을 움직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죠.
물론 범인을 만나러 갈 땐 빼고 말이죠!
이렇게 추리의 스케일이 커져버린 것은, 수많은 인원들의 에너지가 그야말로 격동하는 학교의 문화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한몫 했습니다. 사토시가 느꼈던 그대로, 그야말로 학교 전체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이죠. 자신이 흥미 있는 부활동에 소속되어,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개성을 문화제 기간 동안에 마음껏 보여주는 ‘모두가 참가하는 즐거운 축제’의 모습은 사뭇 부러워 보이기도 할 정도입니다. 이런 축제라는 각별한 일상 경험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여러 가지 일화들도 군데군데 일화로 넣어주면서 문화제를 구경하는 쏠쏠한 재미도 있습니다.
에너지 넘치는 파티를 지켜보는 것 또한 <쿠드랴프카의 차례> 편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재미 중에 하나죠.
여담으로, 다수의 의견을 들은 것이 아니어서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몇몇 일본인 지인들에게 문화제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사립 학교의 경우는 문화제가 간소화되어 있는 것에 반해, 공립 학교의 문화제는 본격적으로 파티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흥미가 생겨서 한 번 살펴봤는데, 호타로가 다니는 카미야마 고등학교는 '현립 고등학교'로 국공립 고등학교라는 것을 알 수 있죠. 2
호타로가 고등학교 홈페이지를 서핑하는 장면에서 보면 ‘현립 고등학교’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학생이라고 하는 정해진 역할의 틀에서 벗어나, 어쨌든 학생이라는 신분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공부하는 능력 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능력을 펼치는 문화제라는 자리는 그것이야말로 에너지고, 활력이자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성과 능력이 마음껏 발휘되는 자리는 누군가에게는 절망적인 격차를 확인하는 씁쓸한 자리가 된다는 가능성 또한 포함하기도 합니다. 개성이라는 부분에서는 덜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능력이 격동하는 자리’라는 시점으로 문화제라는 행사를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특히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의 결과물이 모이는 곳이란, 좋건 싫건 상관없이 능력의 격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자리라고 할 수 있죠.
<쿠드랴프카의 차례>에서 발생했던 메인 사건의 범인, 괴도 십문자十文字와 이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줄줄이 얽혀 이어졌던 것은 문화제의 이런 속성에서 발생합니다. 특히 십문자 사건이라는 특수한 사건까지 일으키며 어떤 메시지를 만들어 학교 전체를 이 사건에 주목하게 만든 것은, 그저 나와 저 사람의 능력에 격차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그런 단순한 외침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까지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과 이제서야 처음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처음 한 사람의 능력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제까지 그 능력을 발휘하고자 했던 사람이 느끼는 절망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그 이유를 자세히 언급해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확실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절망감의 깊이가 사람들이 주목해줬으면 할 정도로 소리치고 싶었던 목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죠.
이 사건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행동 동기이자 결과물이었던 ‘절망감’
이른바 ‘정공법’만이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씁쓸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많이 봤던 만화에서 배신한 친구는 정의로운 주인공에게 어떤 형태의 벌을 받고 결국은 잘못을 뉘우치는 내용이 많은 것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석적인’ 도덕이 ‘배신은 나쁘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그렇게 순진하게 흘러가주지 않습니다. 사회의 모든 것이 ‘정석적인’ 명제를 따라간다면 이 사회에 억울한 사람은 없었을 터인데, 사회에는 버젓이 억울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법 또한 배신한 사람들이 처벌을 받도록 설정되어 있지만, 그 틈을 피해서 배신한 사람이 잘 되어 잘 살고 있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 사회라는 곳이기도 하죠.
이것을 능력에 관한 이야기로 살짝 말을 바꿔보자면 대체로 사회가 동의하는 ‘정석적인’ 명제는 ‘많이, 그리고 오래한 만큼 잘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틀린 말이라고 보기에도 어렵구요. 하지만 그렇다고 능력에 관해서 경력과 능력이 비례한다는 명제가 항상 적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능력이 모자라지만 노력하면 능력이 더 성장할 것이란 믿음의 근거는 ‘하는 만큼 능력이 오른다’라는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동의하는 명제이기 때문인데, 처음 하는 사람이 나보다 아득한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은 이 명제에 맞지 않는 사례가 나타났다는 것이 됩니다. 명제에 맞지 않는 사람의 등장이 절망감을 만드는 이유는 이 명제에 전부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예외’를 발견했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도 한몫을 했다고 할 수 있죠.
이렇게,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에서 학교를 통해 가르쳐주는 규칙들이 이 사회의 전부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목격하거나 깨달았다는 것은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예외의 발견’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련과도 같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쇼크’와 같은 부정적인 일이니까요. 이런 ‘쇼크’는 이 일에 어떻게 대처해서 어떤 해결책을 내느냐에 따라 사회에서 살아가는 가치관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장에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 ‘쇼크’에 느꼈던 절망감의 정도가 컸다면 ‘어차피 해도 안 되는 거 해봐야 뭐해’라는 무력감이 가치관으로 형성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건 잘못 되었으니 고쳐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반기를 들고 적대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사회가 제시했던 룰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불신으로 가치관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수도 있는 거지, 하면서 깔끔하게 인정하고 무덤덤해지는 사람 또한 있겠죠. 이 편에서 등장하는 절망감이란 심리가 성장이란 주제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회를 살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기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후유미가 들려준 일화를 이 편까지 기억해달라고 한 것은
이 일화가 <쿠드랴프카의 차례>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심리의 구조를 잘 보여주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이 편에서 등장하는 절망감을 대표하는 표현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기대’라는 단어입니다. 막상 보면 ‘기대’라는 단어가 절망감과 연결될 만한 단어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는 합니다. 기대한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을 응원하면서 제법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오늘 네 공연, 기대할게’와 같은 느낌으로 말이죠. 그렇다면 이 ‘기대’라는 단어가 절망감과 연결할 수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 ‘기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스토리를 따라가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요일, 빙과의 7번째 포스팅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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